최고의 축구 선수를 만드는 비결
[김성호 기자]
리오넬 메시가 통산 여덟 번째 발롱도르를 안았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 나아가 역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 같은 전 시대 거물의 아성을 넘어서 메시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전설이 쓰일 수 있음을 입증해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경기로 꼽히기에 부족함 없는 명승부가 월드컵, 그것도 결승전에서 쓰였단 점이 그랬다. 주인공은 최고의 선수 메시, 상대편엔 다음 십 수 년을 책임질 미래 킬리안 음바페가 있었다. 둘은 최고의 활약을 거듭하며 승부를 연장까지 이끌었다. 주지하다시피 최후의 승자는 메시, 그리고 아르헨티나였다.
월드컵 우승은 어느 한 선수의 능력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와 엘링 홀란드 등 내로라 하는 선수가 월드컵 무대에선 영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르헨티나의 우승에 오로지 메시 한 명만을 바라보는 건 그래서 적절치 못한 태도다. 아르헨티나의 축구가 강하다면 그건 그런 선수를 길러내는 아르헨티나 축구문화의 기여가 있기 때문이다.
▲ 무엇이 세계 최고 선수를 만드는가 책 표지 |
ⓒ GRIJOA FC |
최고의 선수를 만드는 축구강국의 비결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최고로 꼽히는 아르헨티나 유소년 축구 이야기는 흥미로울 밖에 없는 소재다. 아르헨티나를 넘어 남미 전역, 심지어는 한국과 일본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서까지 유학을 오는 이들의 유소년 축구문화가 우리와 얼마나 다른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5년 겨울 아르헨티노 주니어스 U-16팀을 데리고 한국을 찾아 그보다 두 살 가량 많은 고등학교 팀들을 연파하고 돌아간 지도자 박민호의 책 <무엇이 세계 최고 선수를 만드는가>가 바로 그러한 책이다.
대입에 실패하고 축구화를 벗은 뒤 2008년 홀로 아르헨티나를 찾아 지도자의 길을 밟은 박민호가 제 경험을 담뿍 담아 펴낸 책이다. 단 몇 시간이면 금세 읽을 수 있는 짤막한 분량으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얻지 못할 지식들을 책 안에 녹였다.
아르헨티나에 비해 축구 후진국이라 해도 좋을 한국인 청년이 현지 프로축구팀에서 일하기까지 마주한 우여곡절 가운데, 한국과 다른 아르헨티나만의 축구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한국의 성적지상주의와의 차이다. 한국도 학원축구로 변모하며 체질개선을 시도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과거의 문화로부터 탈피하지 못했단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대입과 프로입단이라는 좁은 문과 그에 따른 대가는 한국 축구산업 전체와 긴밀히 엮여 있다. 프로축구 및 대학축구 지도자의 금품수수와 형사처벌 이야기가 잊힐 만하면 터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저자는 이 같은 문화가 아르헨티나와 한국 축구선수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한국 축구선수 하면 떠오르는 180cm를 훌쩍 넘는 훤칠한 체격과 몸싸움, 평준화되어 있는 기량, 반면 개인기가 뛰어난 선수가 많지 않다는 이미지가 모두 이와 관련되어 있다.
유소년 시절부터 성적을 내야 하는 지도자는 또래보다 체격이 큰 선수를 선발 명단에 올리고 선수들에게 돌파보다는 안전한 패싱게임과 체력훈련을 지시하게 마련이라는 얘기다.
축구철학을 뒤흔든 현지 지도자의 한 마디
반면 아르헨티나 유소년 지도자는 팀 성적만큼이나 개인의 육성에 중점을 두고 있고, 지도자보다는 선수 개인의 성향을 중시하는 문화 탓으로 선수들이 저마다의 장점을 살려낼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고 말한다.
"유소년 교육은 승리가 아니라 성장에 목표를 두어야 하네.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클럽의 첫 번째 목적은 좋은 선수를 길러내는 거야. 그러려면 지도자는 매 순간 선수를 관찰하면서 선수의 장단점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해. 그들의 능력을 키워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야."
디에고 감독님의 말씀은 내 축구 인생에서 가슴 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은 말이었다. 축구화를 신고 운동장에 축구를 배우러 나온 아이들은 각양각색이다. 날쌘 아이, 느린 아이, 키가 큰 아이, 키가 작은 아이 등등 다양하다. 그렇다면 모든 선수에게 다 통하는 지도 방법은 있을 수가 없다. -77p
서울에서 꽤 이름난 학교에서 축구선수로 지냈던 가까운 친구가 언젠가 내게 한 말이 떠오른다. 그가 선수로 경기하던 중 감독이 터치라인에서 손짓을 해 달려갔더니 제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서 따귀를 후려치더란 것이다. 부모님까지 와 계신 경기 중이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보통의 일이어서 문제 삼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보다 몇 살 위인 저자 또한 책 가운데 제 축구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떠올린다. 경기 중 감독이 불러 갔더니 똑같이 따귀를 올려붙였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맞은 이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를 해야 했다고 한다. 그게 한국의 어제였다.
그렇다면 한국 유소년 축구의 오늘은 많이 달라졌을까. 이미 학부모가 되어 자식을 이름난 축구교실에 보내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그러나 그 모습은 아르헨티나와는 또 사뭇 다르다.
한국 축구교실에선 부모들이 관중석에 앉아 휴대폰을 들어 영상을 찍는다. 아이를 축구교실로 데려오고 또 데려가며 늘 아이와 함께 하는 부모들이 많다. 지도자에게 이런저런 요구도 멈추지 않는다. 저자 또한 한국에 방문했을 당시 제 아이 지도자의 험담을 하며 제게 잠깐 지도를 해달라 청하던 한국 부모를 대면한 기억을 떠올린다. 아이를 보내고는 지도자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아르헨티나의 문화와는 영 다르다는 이야기다.
축구를 넘어 교육을 생각하게 한다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세계 최고의 선수를 기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스스로 판단할 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좁게는 필드 위에서, 훈련장에서, 동료와 지도자 사이에서, 그리고 나아가 제 꿈과 미래, 인생 전체를 놓고 스스로 결단해 부딪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판단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게끔 이끄는 것이다.
판단력이야말로 아르헨티나 축구판에서 재능이라 불리는 영역이며, 그 타고난 재능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르헨티나 지도자들의 역할이다. 타고난 판단이 다른 선수에 미치지 못할 때 이를 보완할 수 있게끔 기술과 운동능력을 길러주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고의 선수를 이루는 중추는 판단력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이쯤 되면 책은 단순히 유소년 축구에 대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사교육 중심의 엘리트 교육, 나아가 조기교육과 지나친 부모의 관심으로부터 받아들이기만 할 뿐 주체적으로 서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를 밖에 없다.
기술도 체력도 우수하지만 경기장 안에서 움츠러들어 제 역량을 펼치지 못하는 한국 선수들의 단점은 고스란히 사회에서도 드러나지 않던가. 그럼에 <무엇이 세계 최고의 선수를 만드는가>는 독립적인 어른으로 자라나지 못하는 한국 교육의 현실을 일깨우는 저작이라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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