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랑] 죽음을 혐오하는 사회에서

기고자/정현채(서울대의대 명예교수) 2023. 12. 2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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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가분한 죽음>

죽음이 언제 올 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고찰하고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서울대의대 정현채 명예교수의 칼럼을 연재합니다.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의사로서 40여 년간 환자를 돌보다가, 2018년 방광암이 발견돼 여러 차례의 항암 치료와 수술을 받았습니다. 나이 오십을 바라볼 때 문득 자신의 죽음에 대해 궁금해지고 두려워져 죽음을 연구하기 시작한 분입니다. 아미랑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이들이 죽음에 대해 고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준비할 때에만 우리는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짐이 되지 않도록, <홀가분한 죽음>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헬스조선DB
우리 사회는 여전히 죽음을 외면하고 혐오합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려고 할 때, 잠시 멈칫한 적 있지 않으신가요? 또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거나 이내 다른 화제로 주의를 돌린 적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2008년 서울의 어느 구청에서 주관한 ‘웰다잉을 위한 행복한 삶, 아름다운 마무리 준비 교실’의 5회 강좌 중 한 번의 강좌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하러 그곳에 간 날 담당 공무원을 만나 강좌를 열기까지의 과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원래는 강좌 제목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는데, 상부에서 결재를 해주지 않아 몹시 애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빼고 ‘웰다잉’을 넣었더니 그제야 결재 도장을 찍어 주어, 계획했던 강좌를 무사히 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2009년 가을의 기억도 있습니다. 어느 의학 관련 학회에서 죽음학 강의를 요청해 왔습니다. 강의 제목을 ‘죽음과 임종’이라고 적어 제출했더니 학회에서 난색을 표하더군요. 죽음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있으면 너무 칙칙해 보인다는 거였지요. 강의 제목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빼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해 와서 ‘아름다운 마무리’로 바꾸고 강의를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모두 1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불과 2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기업에서 강의 요청을 받고 제목을 ‘죽음은 소멸인가, 옮겨감인가?’로 적어 보냈더니 담당자로부터 제목이 어둡고 께름칙해 보이니 바꿔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지성인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바꾸고 난 후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제가 죽음학 강의를 시작한 16년 전에 비하면 그사이 죽음에 대한 척박한 인식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인 관념은 참으로 뿌리 깊은 것 같습니다. 생명이 있는 어떤 존재도 피해 갈 수 없는 게 죽음이건만, 죽음이라는 현실을 직면하고 사유하기를 기피하고 거부합니다.

우리 문화가 원래 이렇게 죽음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요? 비교종교학자인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우리의 죽음 문화가 지금과 같이 된 것은 유교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까지는 존재에 대한 성찰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가 정신적인 바탕이 됐었는데, 조선시대 600년 동안 내세관이 없는 유교가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면서, 장례문화를 비롯해 죽음과 관련된 생각과 행동들이 지금과 같이 형성됐다는 겁니다.

200년 전에 가톨릭이 들어오고 100년 전에 개신교가 들어왔어도, 우리나라 사람의 머릿속에는 유교가 워낙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생사관에서는 여전히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 중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끝이지 뭐”라고 말하는 걸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대형 건물 승강기에서 4층을 F층으로 표시하거나 4층은 아예 없애고 3층에서 바로 5층으로 건너뛰거나 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이라는 말이 실제로 죽음을 많이 불러올까요? 이를 확인해보려고 몇 년 전에 간단한 조사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서울대학교병원 원내에서, 죽을 ‘死’ 자와 발음이 같은 숫자 ‘4’가 두 개 들어가 있는 44병동과 ‘4’가 하나 들어간 94병동을 포함한 세 병동, 그리고 81병동과 같이 ‘4’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병동 세 곳을 선정한 후 전산실에 협조공문을 발송해, 그 병동들의 1년간 입원 환자수와 사망 환자수를 병동별로 비교해봤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4’가 두 개씩이나 들어간 44병동은 정형외과 병동이라 1년간 사망환자가 전혀 없었지만 ‘4’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병동은 중환자가 많이 입원하는 내과병동이라 사망 환자수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죽을 4자’라고 해서 죽음을 불러들이지는 않습니다.

2017년 7월 29일 경부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하던 기사가 몰던 버스가 앞에 가던 승용차를 덮쳐, 승용차에 타고 있던 부부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승용차 운전자는 난폭 운전을 하지도 않았고 교통 규칙을 준수하며 운행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덮친 버스로 인해 한순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이 분들 만일까요? 우리는 매일매일 뉴스 기사를 보며 그렇지 않다는 걸,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서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날이 내일일지, 1년 후일지, 아니면 십 년 후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시각은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자신이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해 귀 막고 눈 감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죽음을 직면하고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공평하게 찾아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미리미리 마음의 준비와 현실적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대비해 현실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는, 우선 유언장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식과 부모, 배우자 간에 서로 시각이 비슷해야 합니다. 어느 한 편에서 죽음에 대한 시각이 다르면 서운해 하거나 화를 낼까 봐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령 이런 것들을 작성해 놓았다고 해도 막상 결정의 순간에 가족들의 반대로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암을 진단 받으면 주위에서 먼저 이런 얘기를 언급하는 건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몸이 건강할 때, 나에게 의지가 있을 때, 죽음을 잘 맞이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삶의 마무리를 어떻게 하기 원하는지에 대해 주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유언장이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또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주 이야기해 둬야 합니다. 죽음에 관해 완전히 방치된 상태로 있다가 본인이나 가족의 죽음이 코앞으로 닥쳤을 때 벌렁 나자빠지는 상황에 처해지는 건 그 누구도 원치 않을 겁니다.

물론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생명연장 의료기술의 발달과 일부 그 맥을 같이하고는 있습니다. 의료진도 죽음을 삶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중요한 한 단계로 보지 않고, 의료의 패배나 실패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고통만을 주는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환자의 가족이나 의료진이 매달리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해봐야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보람과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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