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자유 찾아 떠난 지도 없는 여행…세계 90여 개국에서 생긴 일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여행작가인 저자의 신작 에세이다. 90여 개국을 여행하고, 15년간 해외에 거주한 작가는 특유의 스타일로 여행과 문학을 적절하게 버무렸다. 독립서점 파리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보낸 6개월, 헤밍웨이의 쿠바 집필실 방문 경험 등 세계 곳곳을 방문한 경험을 소개한다. 여행 중 겪은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벌어진 기상천외한 해프닝과 쿠바에서 만난 민박집 주인, 냉장고 수리공의 이야기는 사람 냄새를 풍긴다.
“학생은 아직 젊어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자유는 외로운 거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선택해야 해.” 힘이 들어간 그의 눈빛이 내 두 눈과 마주쳤다. 그의 강한 시선이 어떤 경고를 하는 것 같아,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 p.31
그의 야심작 『율리시스Ulysses』가 외설물로 판정돼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 길이 막히자, 구원투수로 실비아 비치가 나섰다. 소설가로서 제임스 조이스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그녀는, 이 소설을 1922년 자신의 서점 Shakespeare & Company 이름으로 파리에서 처음 출간했다. 인쇄소에 외상으로 초판 1,000권을 찍었다고 한다. 그녀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선견지명이 없었더라면, 현대문학을 변화시킨 『율리시스』는 훨씬 늦게 세상 빛을 보았을 것이다. - p.59
‘지독한 구두쇠’ 소리를 들으면서도 휘트먼은 남에게 베푸는 데는 인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잠자리가 필요한 낯선 이들에게 서점 내부 구석구석에 놓인 간이침대를 수십 년간 무료로 제공해 왔다. 나같이 장기간 머물고 싶은 사람에게는 돈 한 푼 안 받고 ‘작가의 방’을 기꺼이 내주었다. 주인이 베푸는 뜻밖의 호의 덕분에 서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떠나는 사람도 있고, 며칠 혹은 몇 주 더 머물다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여권이나 신분증을 확인하는 경우는 휘트먼 할아버지에게 있을 수 없었다. 국적도 종교도 이념도 직업도 묻지 않았다. 유일한 요구사항, 아니 권고사항은 서점에 머무는 동안 책을 하루에 한 권 읽을 것! - p.74
안주하고 싶을 때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헤밍웨이는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을 떠났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보금자리와 친구들을 떠났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세계 곳곳에 자신의 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곧 그의 식을 줄 몰랐던 삶과의 치열한 싸움이 남긴 흔적이기도 하다. 그를 젊은 무명 작가에서 유명 작가로 키웠던 프랑스 파리, 그가 삶의 열정을 마음껏 누렸던 스페인 팜플로나, 그를 모국으로 불러들였던 플로리다주 키 웨스트, 그에게 만년설 덮인 킬리만자로산을 보여주었던 아프리카 탄자니아,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남은 열정을 불사르게 했던 쿠바 아바나와 핀카 비기아. - p.118
하늘에 고립된 좁은 기내에서 다양한 해프닝도 발생한다. 내가 직접 경험했던 에피소드도 한둘이 아니다. 중남미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 환승을 위해 미국 휴스턴 공항 라운지에서 대기 중에 나를 마약 운반책으로 의심한 미국 CIA 요원이 접근한 적도 있고, 알래스카에서 미국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승무원들이 나를 합법적으로 총기를 소지한 '요원'으로 착각한 적도 있다. 한번은 독일에서 아프리카 어느 나라로 강제 추방당하는 강력범(살인 및 강간)과 비행기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5시간을 버텨야 했다. (수갑을 찬 그의 반대편 옆자리에는 독일 경찰이 앉아 있었다.) - p.126
시내를 걷다 몽골 국립대학 근처 한 노천카페에 앉아 여유를 즐긴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한정된 시간에 많은 걸 구경하고 싶은 욕심이 자연스럽다. 그만큼 몸도 바쁘고 피곤하다. 나는 관광지 한두 군데를 포기하는 대신 카페에 한두 시간 앉아 여유로운 시간 보내기를 선호한다. 주변 테이블에 앉아 대화 나누는 사람들,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얻는 즐거움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들의 옷차림, 머리 스타일, 표정, 몸동작, 언어와 목소리 톤 등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나라, 그 도시에 대해 의외로 많은 걸 말해준다. ‘말가이’라는 모자를 쓰고, ‘고탈’ 부츠에 ‘델’을 두른 사람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내를 활보하는 모습을 세계 어느 도시에서 또 볼 수 있겠는가! 핼러윈 파티 코스튬이 아니다! - p.198
결국은 인간의 멈추지 않는 탐욕 때문에,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불만 때문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유형의 가치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체 게바라는 큰 위안을 선물했다고 나는 믿는다. 많은 유형의 가치를 포기하고, 자아가 진심으로 원하는 무형의 가치를 추구했던 체. 그는 혁명가 이전에 여행자였다. 항상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에 잡히지 않는 꿈과 이상과 진정한 자아실현을 위해 떠나고 또 떠났다. - p.295
나는 자유, 여행, 상황/환경의 다양성을 동일시한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떠나야만 새롭고 다양한 상황/환경과 맞닥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유와 새로움의 과정에서 우리는 가끔 ‘세렌디피티’를 경험하게 된다. 뜻밖의 만남, 예상치 못한 발견,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 - p.334
왜 떠나는지 묻는다면 | 최범석 지음 | 지도없는여행 | 340쪽 | 1만68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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