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갓 쓰고 팔도유랑한 민중의 벗 이지함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김계휘(金繼輝, 1526~1582)가 나에게 묻기를 "토정(土亭)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은 그를 제갈량에 비기기도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였다.
나는 "토정은 현실적으로 쓰임에 맞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재갈량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를 사물에 비유한다면 그는 기화이초(奇花異草)요, 진금괴석(珍禽怪石)이지, 비단이나 콩·조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토정은 나의 이 말을 듣고 "내 비록 콩이나 조는 아니지만 도토리나 밤은 될 터이니 어찌 전혀 쓸모가 없겠는가"라고 답했다.
율곡 이이가 그의 <경연일기(經筵日記)>에서 기록한 토정 이지함(1517~1578)에 대한 평가이다. 그는 과연 '기화이초 진금괴석' 같은 기인이요, 풍류인이요, 경세가였다.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이지함은 기인의 첫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나아가 명현이었고 백성의 벗이었으며 한 시대를 분방하게 산 풍류객이었다.
이지함은 <토정비결(土亭秘訣)>이란 책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었는데, 패랭이와 쇠갓을 쓰고 짚신에 대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발 크기가 한 자를 넘는 거인인 데다 행실 또한 진중했으니 풍류·장부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쇠갓(쇠벙거지)은 여러 용도로 쓰였다. 외출할 때는 갓으로 쓰고 밥을 지을 때는 솥으로 사용하였다. 객사에 들 때는 요강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는 쇠갓에 엉성한 베옷에다 짚신을 신고 팔도강산을 유랑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다가 졸음이 오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걸었다. 밥을 먹을 때는 한 말을 지어 먹고, 그 뒤 여러 날 동안은 전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잠을 잘 적에는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충남 보령에서 걸어서 하루이면 서울에 닿을 만큼 걸음걸이가 빨라 사람들은 축지를 한다느니, 도술을 부린다느니 하며 괴이하게 여겼다. 작은 조각배 네 귀퉁이에 바가지 하나씩을 달고 여러 차례 제주도를 다녀왔다. 바가지를 팔아 수백 석의 곡식을 모았으나.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글공부를 하면서도 과거 시험에 나오는 주자학(朱子學)보다는 백성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에 더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는 세속의 욕심과 부귀 따위에는 헌신짝처럼 여기며 책읽기와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후일 조선 실학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지함은 조선 중엽인 1517년 한산 이씨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호는 토정(土亭), 자는 형중(馨中)이다. 고려 말의 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의 후손이며, 그의 부친은 현령을 지낸 이치(李穉)이다. 외가인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에서 4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인종(仁宗)이 '백의재상'이라 부른 바 있는 형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지번은 학문이 뛰어나고 천문·지리에도 정통한 학자로서 벼슬을 하다가 윤원형(尹元衡, ~1565)의 전횡에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 생활을 했다.
이지함은 청년기에 서경덕의 제자가 되었다. 송악산에서 제자를 가르치던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이지함은 서경덕에게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배워 이에 통달했다. '사자집'이란 경서(經書)·사서(史書)·제자(諸子)·문집(文集)을 말한다.
서경덕이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것처럼 이지함 또한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젊었을 때, 친구인 안명세(安名世, 1518~1548)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대해 직필한 이유로 처형된 데 충격을 받은 후부터는 벼슬보다 의서와 잡술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지함이 성리학보다 잡술로 취급되는 의학·복서·천문지리 등에 더 열중한 것은 공리공론보다 민생에 도움이 되는 학문으로 백성들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어느 날 율곡 이이가 성리학을 권유하자 "나는 욕심이 많아서 성리학에만 전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욕심이 많아서라는 것은 특정한 학문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지함은 유일한 출세길인 성리학을 거부하고 백성을 위한 '잡술'에 심취한 열외자였다.
과거를 거부한 선비에게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쇠갓에 죽장을 짚고 산천을 돌며, 기품 있는 선비를 만나거나 학승을 찾아서 토론을 벌였다. 서울에서는 이이, 정철(鄭澈, 1536~1598), 성혼(成渾, 1535~1598)과 사귀기도 했고, 지방에서는 지리산 밑에 은거한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을 만나 밤을 지새우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1573년, 56살이 되었을 때 그는 선조로부터 6품 벼슬에 임명되어 한때 포천현감과 아산 현감을 지낸적이 있다. 벼슬에 전혀 뜻이 없어 과거도 보지 않은 그가 두 곳의 현감이 된 것은 탁행지사(卓行之士, 학문과 행실이 탁월한 선비)로 추천되었기 때문이다.
포천현감이 된 이지함은 보령에서 걸어 임지에 부임하였다. 새 현감이 부임하자 관솔들이 온갖 음식이 가득한 잔칫상을 내왔다. 하지만 그는 "먹을 것이 없다"며 이를 물렸다. 그리고는 잡곡밥 한 그릇과 나물국을 쇠갓에 담아 맛있게 먹었다.
백성들은 제대로 끼니조차 잇지 못하고 있는 터에 명색이 목민관이란 사람들이 호의호식해서야 될 말이냐고 호통을 치며, 몸소 검소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런 벼슬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듬해 포천 고을 백성들을 위해 임금께 상소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4년 후 그는 다시 아산현감에 임명되었다. 관내는 흉년과 탐관오리들의 착취로 피페해질 대로 피페해져 있었다. 굶주린 백성과 걸인들이 거리를 메웠다. 그는 서둘러 걸인청을 세우고 이들의 구호에 나섰다. 그리고 걸인들에게 각자의 적성에 맞는 수공업을 가르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그는 또 관내에 양어지(養魚池)가 있다는 이유로 수시로 물고기를 진상해야 하는 고을 백성들의 고초를 헤아리고, 이를 폐지시켰다. 그러면서도 상급 관청의 미움과 질책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관직이 오래 갈 리 없었다. 또 원하지도 않았다.
이지함은 대부분의 생활을 서울 마포 강변 둑에 지은 흙담집에서 지냈다. 언덕 한쪽을 파서 방과 부엌을 만들고, 그 언덕에다 처마를 달아서 비와 이슬을 막게 하였다. 밤이면 토굴과 같은 방에 들어가서 자고, 낮이면 그 위에 올라가서 한강을 바라보며 <주역(周易)>을 읽었다. 그는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면서 백성들과 똑같은 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풍류를 잊지 않았다.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장가 든 다음 날 홍제교의 거지들에게 도포를 벗어 주고, 제주도에 심은 다량의 박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많은 돈을 모아서 빈민 구제에 썼다. 그러니 정작 그의 집에서는 끼니를 걱정할 때가 적지 않았다.
어느날 남명 조식이 한강 토담집으로 이지함을 찾아왔다. 학식이 깊고 호걸의 기상이 있는 남명이었다. 이지함보다 나이가 위인 조식이 술병을 들고 그의 문전을 찾게 된 것은 그만큼 이토정의 인품을 높이 본 때문이었다. 이지함은 의관을 갖춘 후에 조식을 방으로 모셔 들였다.
"선생께서 어떻게 이렇듯 누추한 데를 다 찾아오셨습니까?"
"지나던 길에 들렀소. 술은 내가 한 병 사들고 왔으니 어서 술상이나 내 놓소."
두 사람은 세상사와 학문에 대해 이야기가 끊임없이 오고 가던 나머지, 조식은 이지함의 언행과 처신을 보고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고결한 선비라고 칭찬을 마지않았다.
이지함은 천문·지리·의약·점술·산수·신방비결(神方秘決)등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작은 재주를 일삼지 않았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것은 그의 기행·풍류 등으로 미루어 후대 사람이 엮은 비결서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당시 어수선한 시대에 사람들에게 헛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살아가라는 처세훈을 가르친 것이 운세를 보는 도사처럼 비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실천적인 학문에 뜻을 두고, 양반 신분이면서 농부와 어부 그리고 상인들과 어울려 함께 살다 간 '선비백성'이고 무욕무탐의 풍류인이었다.
아산 현감으로 있을 때 죄를 지은 아전을 크게 꾸짖은 적이 있었다. 아전이 원한을 품고 지네의 즙을 짜내어 술에 섞어 보낸 것을 이지함은 의심하지 않고 마셨다. 그것이 기인다운 죽음일지 몰라도 <토정비결>과는 전혀 무관한 최후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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