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나이가 없는 것처럼
검열로 자신 괴롭히는 대신
지금을 무구하게 표현할 것
세상에서 가장 멋진 칭찬을 생각한다.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말을 해주는 건 자의식 과잉 같고, 상대가 듣고 싶을 말을 하는 건 진실하지 못한 것 같다. 내 눈에 비친 고유함을 표현하는 거라면 정답은 없겠지 하고 체념하고 싶지만 정답 같은 칭찬은 분명 존재한다. 수전 손택이 롤랑 바르트를 추억하며 남긴 이 표현보다 더 멋진 칭찬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그는 나이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정답 같은 칭찬은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젊어 보인다거나 성숙하다란 말보다 훨씬 상대를 빛낸다. 나는 언젠가부터 매해 새 일기장에 이 칭찬을 빌려왔다. ‘나이가 없는 것처럼 살자.’
‘나이에 맞게 살아라’라는 말이 늘 불편했다. 나이는 어떤 권리나 의무를 부여할 수 있어도 지혜나 혜안을 보장하지 않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지구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뜻.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사랑하는 것도 싫어지는 것도 많아졌다. 나이 사이에 켜켜이 배어 있는 복구 불가능해 보이는 상처, 다시는 그토록 생생할 수 없을 행복한 추억, 사소한 죄와 묵은때도 많이 쌓였다. ‘이전’과 ‘예전’이 판단의 참조로 등장하고 아는 척과 해본 척에 능숙해져 지금을 사는 걸 방해한다. 현재를 축소하고 감각을 흐리는 게 나이 듦이라면 그건 좀 많이 싫다. 객관적 숫자인 나이를 거부할 순 없지만 나이에 맞는 명확한 태도나 의식의 규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때 ‘나이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칭찬을 만났다. 그것은 철없음이나 깊이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았다. 뻔뻔함도 아니었다. 나이를 핑계로 잃기 쉬운 천진함을 간직한 이를 위한 찬양, 훔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탐나는 칭찬이었다. 지구에 막 발을 내디딘 사람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아는 척 않고, 두려워 않고 왜곡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세월과 참조를 초월하여 이룬 그 단단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피렌체 두오모 성당 앞에서 성당 구석구석을 낡은 사진기로 공들여 찍던 백발 여인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아름다움만큼은 영원히 존재하리란 걸 믿게 해준 눈빛이었다. 하얀 머리색이 그녀를 하나도 늙어 보이게 하지 못했다. 생기로 충만했다. 딸기를 처음 맛본 아기의 표정은 달콤함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그가 만날 무수한 미각의 모험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표정이었다. 그 ‘처음’을 재현할 순 없어도 그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울 수는 있다. 바로 ‘무구한 표현’이다. 자신의 마음과 감상을 투명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낡지 않는다. 주어진 빈칸을 매번 차근차근 새로이 채우는 것을 택하는 영민한 사람들. 렌즈의 초점을 지금에 맞추는 여인, ‘맛있다’를 연발하며 해맑게 웃는 아가의 표정처럼 곁눈질 않고 산뜻하게 답하는 태도에는 유효 기한도 연령 제한도 없다.
올해엔 세 개의 나이를 살았다. 6월 이후로 갑자기 두 살 어려졌고, 생일을 기점으로 다시 한 살을 먹었다. 한 해에 세 개의 나이를 살아보니 정말이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해가 새 나이를 보장하지 않는 첫 신년을 앞두고 내가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이 세계임은 분명하다.
올해도 ‘나이가 없는 것처럼 살자’고 외칠 것이다. 목표만 있고 구체적인 실천 법은 없었던 그 다짐을 이룰 방법을 조금 알 것 같다. 관념에 침몰되거나 자책과 검열로 자신을 납작하게 만드는 대신 이 순간을 무구하게 표현할 것. 무구함의 구는 때와 부끄러움을 뜻하니, 내게 또 없어야 할 것을 배운다. 나이를 벗고, 나이가 만든 부끄러움의 때를 벗고, 감히 무구함을 추구하고자 한다. 감히를 붙이는 걸 보니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다가오는 새해의 일기에 당당히 한 줄을 추가해야지. 나이가 없는 것처럼, 때가 없는 것처럼 살자.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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