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강력한 희망의 소식
동지가 다가오면서 어둠이 더욱 깊다. 새벽녘 창밖의 짙은 어둠을 내다본다.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로등 불빛조차 창백하다. 사람들의 벌건 욕망이 깨어나기 전 세상은 고요하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의 한 구절이 입에 감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최후의 나’라니! 시인은 왜 이리 비장한 것일까. 순수하고 예민한 감수성의 시인은 시대의 어둠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자기를 견딜 수 없다. 살기 위해 적응해야 하는 현실이 욕스러운 것이다. 애써 부여잡는 희망은 결국 아침이 밝아올 거라는 사실이다. 과연 아침은 저절로 오는 것일까.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전쟁이라 말하지만 실은 소탕전에 가깝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이스라엘 군인들의 오인 사격으로 인질로 잡혔던 이들이 숨지는 사건도 벌어졌다. 백기를 든 민간인들까지 쏜 것은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할 때 이성은 작동되지 않는다.
어느 병원에 한 아기가 실려 왔다. 폭격으로 부모를 잃는 아기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의사들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아기의 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트라우마 아기’라고 적어놓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고 다정한 음성으로 호명되었을 아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 아이는 일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전쟁은 희망의 소거다.
독일계 미국 화가인 게리 맬처스는 1891년 예수의 탄생을 주제로 그림 한 점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예수의 탄생을 다룬 성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방박사도, 목자도, 짐승도, 밝은 별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성화임을 보여주는 것은 구유에 눕혀진 아기 예수를 두르고 있는 환한 광채뿐이다. 아기는 평온해 보인다.
그에 비해 마리아는 기나긴 산고에 지친 듯 벽에 놓인 부서진 수레바퀴에 몸을 기댄 채 비스듬히 누워 있다. 다리를 쭉 뻗고 있지만, 바닥에는 모포 한 장 깔려 있지 않다. 산모의 몸에 냉기가 스며들지도 모르겠다. 마리아의 발은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인지 조금 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은 그저 고요할 뿐 기쁨이나 감격의 빛이 서려 있지 않다. 아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두운 미래를 예감하기 때문일까. 낮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무릎께 두 손을 모으고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바라보는 요셉의 표정은 사뭇 결연하다. 미간의 주름은 그가 감내해야 할 무거운 소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결국 입구 계단 옆에 세워진 지팡이를 손에 쥔 채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전체주의 사회를 경험했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탄생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멸성이 모든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면 탄생성은 고착된 운명과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기를 거부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킨다. 어둠이 아무리 지극하다 해도 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절망의 심연 가장자리에 내몰린 상태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의 탄생성이다. 탄생성이야말로 고착된 운명을 타파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다.
부모의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림 속의 아기 예수는 평온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빛이고 메시지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단하지만 취약해진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이야말로 빛을 만드는 능동적 행위다.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는 연약해 보이지만 그 아기의 존재야말로 고단한 그의 부모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트라우마 아기’의 품이 되어주려는 사람들, 벼랑 끝에 내몰린 채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설 땅이 되어주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 세상의 희망이다. 이 춥고 스산한 계절, 어둠이 깊어가는 시절에 우리는 가장 강력한 희망의 소식을 듣는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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