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미의 마음 읽기] 영원과 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걸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다. 여행을 가면 풍경 자체보다 풍경 속에 내 모습을 어떻게 담을지를 더 생각했고 몇 시간이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놀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게 즐거웠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드는 사진이 한두 장은 생겼기 때문에 나는 그 ‘건진 사진’들로 그 시기나 그 계절의 나를 기억하고 기록하곤 했다.
불과 한두 해 전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사진을 찍고 찍히는 것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공간 속 그날의 내 모습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욕구도 생기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자 다른 이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순간순간을 남기는지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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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으로 시작하는 이음절 게임
사진 찍을 때 어색함 줄어들어
남의 얘기 쓰는 소설가의 시간
사진 속의 나는 얼마나 나일까
」
이건 좋은 징조인 걸까 나쁜 징조인 걸까. 누구에게나 세상과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은 시기가 있고 그럴 때 나는 여러 단계를 거치며 침잠하거나 그냥 구겨져 있곤 한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소설가로서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혀야 할 때가 있다. 공적으로 사진을 찍혀야 한다는 건 내 통제권 밖에서 포착된 내 모습을 봐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후유증이 따라올 확률이 높다. 소설가로서 찍힌 내 모습이 낯설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누구누구인 내 사진을 보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나 같지가 않네.’ 가까운 이에게 묻곤 한다. ‘내가 이래?’ 사진 속의 소설가인 나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내 모습과도 다르고 거울 속에서 만나는 내 모습과는 더더욱 다르다. 무엇보다 소설가 정체성으로 앉아 일을 하고 있을 때의 나와 가장 많이 다르다.
그것은 독자들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소설이랑 이미지가 너무 다르다는 말을 들을 때와는 다른 감각이다. 독자한테 직접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내가 소설가용 페르소나를 꽤 잘 유지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생각에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덕분에 더 강도 높게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사진이 찍힐 때는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알 수 없는 타인의 시선과 그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만이 가득 들어찬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데 그 소설을 쓴 소설가로서 공적인 매체에 나를 드러내야 할 때 가장 갇히는 것이다. 나는 이 간극이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사진 찍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피하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수락했을 때의 스트레스보다 고사했을 때의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걸 알기 때문에 후유증을 감수하고 기꺼이 사진을 찍히러 갈 때가 있다.
이달 초, 한 잡지의 작가특집호 지면을 제안받고 신촌에 있는 어떤 스튜디오에 가게 되었다. 인터뷰 영상과 낭독 영상, 잡지에 게재될 사진들을 찍는 자리였다. 스튜디오 안에선 대행사 분들이 촬영 시작 전의 막바지 점검을 하고 있었다. 소품 하나하나의 배치에 심혈을 기울이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아무리 내 모습이 낯설어져도 도망갈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영상 촬영을 마치고 낭독 촬영을 시작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한 피디가 내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초성 게임을 하자고 했다. ‘이응(ㅇ)’으로만 시작되는 두 음절의 단어를 대는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끌어내기 위한 일이었기에 나는 구원자를 만난 것도 같았고 나를 가장 긴장시키는 독자군인 이십대 여성과 정면으로 마주 앉아 있었기에 떨리기도 했다. 오이. 아이. 나는 그런 단어들을 말했을 것이고 피디는 더 많은 단어를 말했는데, 그러니까 나를 이겼는데, 지금은 피디가 말한 단어 중 영원이라는 단어만이 기억이 난다.
촬영하고 돌아온 며칠 후 메일로 사진이 도착했다. 선호 사진 다섯 장과 비선호 사진 다섯 장을 골라 회신을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사진 폴더 속에는 여전히 낯선 내가 가득했지만 나는 그다지 괴롭지 않게 선호 사진을 고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좀 더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마주 앉았던 협업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마주 앉아 있는 동안 나는 타인의 시선과 나 자신에게 사로잡히는 대신 눈앞의 한 사람에, 그 사람과의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영원과 오이 사이에서 나는 웃고 있었다. 그러니 그때의 나를, 나는 선호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최은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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