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일본 바둑영재가 몰려온다
세상은 가속의 시대라지만 바둑의 시계는 여전히 느리게 간다. 변화도 느릿하게 일어난다. 한국바둑이 일본을 압도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14세 소녀기사 나카무라 스미레 3단이 그걸 조용히 깨뜨렸다. 올해 2월 사상 최연소 여류기성이 돼 일본 열도가 떠들썩했는데 돌연 한국 이적을 선언했다. 스미레 아버지는 나카무라 신야 9단. 지난 10월 고바야시 사토루 일본기원 이사장 등이 배석한 일본기원에서의 기자회견은 이랬다.
Q : 이적을 결정한 이유는.
A : “지금의 저에겐 보다 높은 수준의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결정했습니다.”
Q : 일본과 한국의 바둑 환경 차이는.
A : “전체적으로 한국이 조금 더 수준이 높은 것 같습니다.”
일본기원으로서는 일본바둑의 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고통스러운 장면이었지만, 바둑 내부에서는 이미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요다 노리모토 9단은 일본이 배출한 최고 기사 중 한 사람이다. 한데 그의 두 아들은 한국의 〈장수영 도장〉에서 바둑을 배운다. 도장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박병규 9단의 설명은 이렇다.
“요다 9단의 둘째 아들 요다 오오조라(20)는 5년 전 한국에 유학해 도장에 들어왔고 2년 전 일본기원에서 프로 입단에 성공했다. 셋째 아들 요다 텐신(13)은 아직은 인터넷바둑 4~5단 실력이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한국의 도장이 어떤 곳인지 경험하려는 정도로 바람도 쐴 겸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상황인데 재능이 있다.”
‘한국 킬러’라는 별명을 지닌 요다 9단은 개성이 뚜렷한 기사였다. 조훈현 9단과의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상대의 중얼거림에 대항하여 귀마개를 하고 나온 것은 두고두고 화제였다. (감각을 떨어뜨려 자충수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신라호텔에서 열린 유창혁 9단과의 제1회 삼성화재배 결승에서는 일본 전통의상인 하오리를 입고 나와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대국할 때 도끼 찍듯 큰 소리로 착수하여(일명 도끼타법) 매너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1990년대 일본바둑의 보루이자 일본바둑의 상징이던 요다가 두 아들을 한국으로 보냈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박병규 9단은 그동안 도장에서 약 50명의 일본학생과 기사를 접하며 느낀 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한국은 프로 입단 경쟁이 일본보다 치열하다. 전국 규모의 어린이 대회는 거의 매주 어디선가 열린다. 내가 아이들을 인솔해 데리고 다니는 대회만 연 35회 정도 된다. 일본은 연 3, 4회가 전부다. 둘째, 한국의 도장 시스템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온종일 공부한다는 장점이 있다. 일본은 학업을 절대적으로 병행하기 때문에 공부량이 적다. 셋째, 한국은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수평적이다. 할 말 다한다. 하나 분명한 건 일본도 변화하고 있고 바둑을 좋아하고 재능있는 친구들도 많아 앞으로는 크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해 일본 관서기원에서 9세 4개월에 프로입단에 성공한 기사가 나타났다. 신기록의 주인공은 후지타 레오. 특별입단이긴 하지만 난공불락이던 조훈현의 기록을 넘어섰다. 그가 지난 11월 문경새재배 바둑대회 현장에 아버지와 함께 나타났다. 문경새재배는 아마-프로가 함께하는 대회. 첫판 아마선수에게 승리했으나 나현 9단, 박동주 3단에게 연패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한데 후지타 역시 한국유학과 함께 스미레가 공부한 〈한종진 도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종진 9단(기사회장)은 “후지타는 4학년 중 가장 센 것 같다. 그맘 때 신진서 9단의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앞으로 일본의 바둑 영재와 한국의 도장이 적극적으로 손을 잡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본바둑은 역사가 깊다. 하나 저 유명한 기타니 도장이 문을 닫으면서(1974년)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좀 엉뚱한 비약이지만, 그 역할을 한국의 도장이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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