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의리가 뭐라고” 원작과 다르게 갔더니 흥했다, 연극 ‘조씨고아’
“왜 그랬어? 다 늙어버렸잖아…. 네 인생은 뭐였어?” 20년을 기다린 순간이지만 뒷맛이 쓰다. 하늘까지 닿을 한을 품게 한 원수가 죽는 순간 정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죄 없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얼굴이다. 원수는 이제 차라리 편해졌다는 듯 정영에게 묻는다. “네 인생은 뭐였어?” 사랑했던 사람들을 모두 복수의 제사상에 바친 정영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2015년 국내 초연해 대한민국연극대상 등 주요 상을 휩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지난달 30일 여섯 번째 시즌을 개막했다. 초연부터 2021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평균 객석점유율 93%였고,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여섯 번째 시즌은 전 회차 매진이다. 상업극이 아닌 순수 연극으로는 이례적이다.
주인공 정영이 조씨 가문의 외동아들 조씨고아와 질긴 운명으로 얽히며 극이 시작된다. 덕 많은 재상 조순을 시기한 진나라 장군 도안고는 조순에게 누명을 씌워 그의 일가 300명을 죽이지만,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 조씨고아만큼은 목숨을 부지한다. 조순에게 은혜를 입은 정영이 목숨을 걸고 조씨고아를 지켜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스러진다. 정영의 어린 아들은 조씨고아로 오인돼 죽임을 당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정영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정영은 20년간 조씨고아를 아들처럼 기르고, 도안고는 결국 조씨고아 손에 죽는다.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칼로 원수를 처단하는 일견 통속적이면서 뻔한 이야기, 더구나 700년 전에 쓰인 중국 고전이 2023년 한국에서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김성희 연극평론가는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다소 평면적으로 내세워 의리와 충심을 강조하는 원작과 달리, 복수의 허무함과 삶의 비극성을 깊이 있게 다룬 점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정영의 아내는 그 ‘깊이’를 더하는 캐릭터다. 조씨 가문에 보은하기 위해 자식을 대신 바치겠다는 정영에게 아내는 일갈한다. “그깟 약속이 뭐라고! 그깟 의리가 뭐라고! 남의 자식 때문에 제 애를 죽여요?” 고선웅 연출은 원작을 각색해 아내가 정영에게 맞서게 했다. 연이은 비극 속에서 정영의 복수는 더는 그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 복수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복수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처럼 삶의 비극성과 대의의 허무함을 표현한 연출은 중국 공연에서도 “극의 밀도를 높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극은 복수의 허무함과 삶의 비극성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데도 전개가 빨라 흡인력이 있다. 무협 신파극 같은 과장된 동작과 슬랩스틱 연기에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지고, 별다른 장비도 없는 단출한 무대에서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배우들의 호흡은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초연부터 정영 역을 도맡아온 하성광, 조씨고아 역의 이형훈, 도안고 역의 장두이 등이 이번에도 무대를 지켰고, 조씨고아 역에 새로 캐스팅된 박승화가 이형훈과 번갈아 관객을 맞는다.
공연은 오는 25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리며, 국립극단 온라인극장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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