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2인자 최창원 수펙스 의장, 신중한 ‘워커홀릭’…투자 시스템 대수술 [CEO 라운지]
수펙스는 SK그룹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과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과 역할과 위상 면에서 겹치는 대목이 적지 않다. 하지만 SK그룹에서는 이런 시각을 극도로 경계한다. 계열사별 이사회가 엄연히 존재하고 주요 현안이 이사회 주도로 결정되므로 수펙스는 지원 조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펙스의 권한과 위상은 단순 지원 조직으로 보기 힘들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수펙스는 각 계열사를 아우르는 규칙(Rules), 규범(Norms) 등을 전파하거나 현안 조율 등 역할로 경영 활동에 포괄적으로 개입한다. 수직적 위계질서만 봐도 수펙스 의장에는 선임 부회장급이 지목돼왔다. 대우는 부회장급이지만 실질적인 위상과 사내 입지는 그 이상으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에 이어 2인자로 평가된다.
최 의장은 서울대 심리학과와 미국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1994년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에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SK케미칼, SK글로벌, SK건설, SK가스 등의 임원을 거쳤다. 2017년부터 소그룹 형태로 친환경·신재생에너지 중심의 중간지주사 SK디스커버리그룹을 마련해 사실상 독자 경영을 해왔다.
최 의장이 수펙스 수장으로 낙점되는 과정에서 보수적이고 신중한 성품도 적극 고려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심리학 전공자로 철학 교수들과 토론을 즐길 정도로 인문학 전반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명상을 즐기며 업무 측면에서는 꼼꼼하고 수치에 강한 ‘워커홀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면모는 인사 스타일에도 엿보인다. 최 의장은 보수적인 CEO 인사 스타일을 보인다는 게 재계 평가다. 그와 사적 인연이 있거나 한번 기용해 검증된 인물을 주로 CEO로 발탁한다. 재계 일각에서는 SK그룹 학맥(學脈) 무게중심이 신일고·고려대에서 여의도고·서울대로 이동할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는다.
최 의장 선임이 갖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보여진다.
첫째, 승계 이슈다. SK디스커버리를 챙기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최 의장이 수펙스 수장으로 낙점된 것은 본격적인 승계를 실행하기 전 징검다리 역할을 맡긴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10월 최태원 회장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경영권 승계에 대해 “아직 공개할 시점은 아니지만 나만의 계획이 있다”며 “정말 고민 중이고 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우선 최 의장이 소유의 관점에서 그룹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현재 그는 SK그룹과 지분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 상태다. 지주사 SK㈜도 SK디스커버리 지분이 없다. 사실상 경영권 분쟁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SK㈜의 최대주주는 최태원 회장(17.7%), 2대 주주는 최태원 회장 여동생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6.6%)이다. 남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 지분율은 0.4%를 밑돈다.
이혼소송 등으로 자녀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선대회장에 버금가는 소유 기반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경영권을 함께 승계하는 것은 난도가 매우 높은 고차방정식이다. 최태원 회장 등 특수관계인이 가진 SK㈜ 지분은 지난 3분기 기준 26%(1901만7262주) 정도로, 그의 세 자녀는 지분이 없다. 이 지분을 전량 인수하려면 현 주가 기준 5조원에 육박하는 천문학적 재원이 소요된다. 50%가 넘는 상속세를 감안할 때 최 회장 자녀들이 소유와 경영을 함께 물려받을 묘책을 단기간에 떠올리기도 매우 힘들다는 게 재계 중론이다. 이런 이유로, 후계 구도와 구체적인 실행 방식의 밑그림이 정리될 때까지 가장 신뢰할 수 있으면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촌 형제에게 실질적인 경영권을 맡기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투자 시스템 정상화다. 재계에서는 이번 인사가 인수합병을 기반으로 성장한 SK그룹의 외연 확장·관리(Boundary Spanning) 전략을 재점검하라는 최태원 회장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본다. SK그룹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에 이어 2012년 SK하이닉스까지 3대 ‘M&A’로 재계 2위에 올랐다. 최근 SK그룹 안팎에서 입길에 오른 M&A·지분 투자 건은 대부분 해외 기업이다. SK하이닉스가 인텔로부터 인수한 중국 다롄 공장과 미국 솔리다임은 그룹 전체 유동성에 압박을 주고 있다. 베트남과 미국에 투자한 기업의 지분 가치도 크게 하락하고 있다. 반면, SK그룹 순차입금(총차입금-현금성 자산)은 2021년 말 59조원에서 올 3월 말 87조원까지 늘었다.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다각화(Diversification)와 외연 확장·관리를 숨 가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비시장 전략 측면의 이상신호를 면밀히 감지하는 역량이 부재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드셌던 배경이다.
이에 따라, 최 의장은 SK그룹 전체 투자 시스템을 정상화시키는 한편, 중복 투자 조율, 자원 재정비 등의 역할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최 의장의 과거 경영 행보를 보면 조직 재정비, 재구성 등에 과감한 추진력을 보였다. 과거 1996년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 기획관리실장 시절 국내 최초로 명예퇴직제를 도입해 주목받았다. 그는 인력의 3분의 1을 감원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국내 재계에서는 인위적인 인력 감축이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결과적으로는 1998년 외환위기 때 완충 효과(Buffer Effect)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그는 이후 워커힐호텔과 SK상사, SK건설에서도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SK디스커버리그룹으로 독자 경영 행보에 나선 이후에도 기존 주력 사업과 신사업 간 차별적인 조직 관리에 능수능란한 면모를 보였다.
당장 SK그룹은 이번 정기 인사와 함께 기존 조대식 의장이 총괄하던 수펙스 내 투자1·2팀을 SK㈜ 산하 4개 투자센터와 합쳐 SK㈜로 통폐합·축소했다. 계열사 간 중복 투자를 대폭 줄이고 신규 투자보단 관리·회수로 전략의 무게중심이 옮겨질 전망이다.
최 의장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그룹 주력 계열사 현안 파악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SK그룹 핵심 성장동력은 반도체와 2차전지다. 과거 최 의장이 몸담았던 계열사는 SK케미칼, SK네트웍스(당시 SK글로벌), SK에코플랜트(당시 SK건설), SK해운 등으로 현 SK그룹 주력 사업과는 결이 다르다.
최 의장은 당분간 SK그룹 현안 파악에 주력하는 가운데 SK디스커버리 대표이사 등 계열사 겸직을 물러나지는 않을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현재 SK디스커버리 대표이사 외에 SK가스 사내이사를 맡고 있으며 SK경영경제연구소에도 적을 두고 있다. 시기를 단정 짓기 힘들지만 최 의장은 그룹 재정비, 후계 구도 확립 등 굵직한 현안이 마무리되면 소유 구조가 확실한 SK디스커버리그룹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SK디스커버리그룹 겸직을 내려놓지 않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으로 풀이된다.
재계 관계자는 “최 의장 선임으로 SK그룹은 사촌·오너 경영 체제로 전환했다”며 “계열 기업 이익 극대화와 독립성 보단 그룹 전체 이익을 우선순위에 둔 신중한 경영 기조가 확산할 것”이라 내다봤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9호 (2023.12.20~2023.12.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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