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련한 정치가 영조, 그림으로도 다스렸다

손영옥 2023. 12. 19. 18:5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즉위 300주년 기념 ‘탕탕평평’전
김두량의 ‘삽살개’(1743년, 종이에 담채, 35.0×45.0㎝, 개인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숙종과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난 영조는 즉위 후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다. 이복형 경종이 자식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1724년 조선 제21대 국왕에 올랐지만, 즉위 초기에는 경종 독살설이 떠돌며 그를 괴롭혔다. 정통성 시비의 배후에 노론과 소론의 대립 등 극심한 붕당 정치가 있다고 판단한 영조는 탕평책을 해결책으로 꺼내 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영조 즉위 30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특별전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전은 바로 이 탕평책에 초점을 맞춰 전시를 풀어간다. 전시를 여는 첫 단추는 ‘감란록’이다. 영조는 무신란(1728)을 진압한 후 편찬한 이 책에서 반란의 근본 원인을 붕당에서 찾는다. “(무신란은) 형님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에 현혹되고 나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급진파 소론 등이 꾸민 것이다.” “난의 원인은 붕당이다.”

‘어제대훈’(1741)이라는 책에서는 자신이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른바 ‘삼종혈맥’을 내세우며 정통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러곤 탕평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탕평비를 세우는 등 글로써 자신의 정책 철학을 구현해갔다.

영조는 글 정치뿐 아니라 미술을 통한 이미지 정치에도 탁월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화원화가 김두량이 그린 ‘삽살개’(1743)에 쓴 어제시이다. 김두량이 47세에 그린 이 그림은 서양화의 사실주의 기법의 영향을 받아 개의 털 한 올 한 올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화면 가득 그려진 삽살개는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는다. 영조는 이 그림에 이례적으로 손수 시를 지어 써넣었다. 그 문장, 자못 서릿발 같다.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가 맡은 임무거늘, 어찌하여 길에서 대낮에 이렇게 짖고 있느냐.”

이 그림은 영조가 노론 중심의 사헌부와 갈등하던 시기에 그려졌는데, 당시 사헌부는 영조의 국왕중심 정치를 비판했다. 영조가 쓴 글귀로 보건대,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낸 삽살개는 영조의 탕평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책으로만 소개된 이 그림이 대중에게 공개되기는 처음이니 실물을 보는 기회를 놓치지 말길.

영조가 쓰고 그린 ‘바위그림’(영묘어필첩 제 29·30면, 1764년). 왼쪽 바위그림에는 특히 백성을 두려워하라는 취지의 글을 써서 마음을 삼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탕평 정책을 통해 붕당의 갈등을 줄인 영조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신체에 고통을 주는 압슬형, 낙형 등 잔인한 형벌을 없앴고, 양인에게 부여하는 역(세금)을 고르게 하는 ‘균역’과 하천을 정비하는 ‘준천’을 실행한 것이 그러한 예다. 하천에 쌓인 흙을 걷어내 물이 잘 통하게 하는 준천 공사를 할 때는 직접 현장에 나가 일꾼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치적을 그림으로 그리게 해 ‘준천첩’으로 역사에 남겼다.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바위를 그려 놓고 그 옆에 쓴 글귀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다. “‘백성들의 험함을 돌아보고 두려워하라’는 말은 서전의 훈계라네.”

‘박문수 분무공신 반신상’(1750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탕평책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왕권의 강화, 지지 세력 규합 등이 필수다. 영조는 그래서 인사 행정에서 왕의 권한을 강화했고 이런 왕의 달라진 위상은 왕실 기록화에서도 드러난다. 전시장에는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해 준, 암행어사로 유명한 충신 박문수의 초상화가 두 점 나왔다. 38세에 그려진 초상과 60세에 재제작된 초상이다. 영조는 무신란을 진압해 공을 세운 이들을 ‘분무공신’으로 봉하고 초상화를 제작하게 했다. 하지만 20년 후 그 공신상이 없어진 걸 보고 애석해 하며 다시 제작하게 했는데, 박문수 초상화 두 점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다. 충신을 초상화를 통해 기리는 방식 역시 영조의 탁월한 미술 정치를 보여준다.

전시는 영조에 그치지 않고, 그를 이어 즉위해 문예부흥기를 완성한 손자 정조가 할아버지의 이미지 정치를 어떻게 계승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정치권 통합을 이룬 정조가 1795년 화성에서 개최한 기념비적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한 ‘화성원행도’ 8폭 병풍은 왕을 중심으로 탕평을 완성한 이상정치의 모습이 구현돼 있다.

최근 몇 년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대중에 영합한 감성적 전시에 방점이 찍힌 감이 없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진득한 연구 성과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이라 반갑다. 국보 1건, 보물 11건, 세계기록유산 5건 등이 나와 안복도 누릴 수 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