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조씨고아'가 보여준 연극의 힘…"네 인생은 뭐였어?"

홍지유 2023. 12. 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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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어? 다 늙어버렸잖아…네 인생은 뭐였어?"

20년을 기다린 순간이지만 뒷맛이 쓰디쓰다.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하늘까지 닿을 한을 품게 한 원수가 죽는 순간 정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죄 없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얼굴이다. 원수는 이제 차라리 편해졌다는 듯 정영에게 묻는다. "네 인생은 뭐였어?" 사랑했던 사람들을 모두 복수의 제사상에 바친 정영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정영은 조씨 가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 '조씨고아'를 살리는 대신 자신의 아이를 희생시킨다. 사진은 정영 역의 배우 하성광이 고뇌하는 모습. 사진 국립극단


2015년 국내 초연해 대한민국연극대상 등 주요 연극 상을 휩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지난달 30일 여섯 번째 시즌을 개막했다. 초연부터 2021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평균 객석점유율 93%를 기록했고 지난달 말부터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여섯 번째 시즌은 전 회차가 매진이다. 상업극이 아닌 순수연극으로는 이례적 인기다.

주인공 정영이 조씨 가문의 외동아들 '조씨고아'와 질긴 운명으로 얽히게 되며 극이 시작된다. 덕 많은 재상 조순을 시기한 진나라 장군 도안고는 조순에 억울한 누명을 씌워 그의 일가족 300명을 죽이지만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 '조씨고아'만큼은 목숨을 부지한다. 조순에게 은혜를 입은 정영이 목숨을 걸고 조씨고아를 지켜내기 때문이다.

누명을 쓰고 멸족을 당한 조씨 집안의 공주가 정영에게 갓난 조씨고아를 맡기는 모습. 공주는 아이를 맡기고 자결한다. 사진 국립극단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스러진다. 정영의 어린 아들은 조씨고아로 오인돼 죽임을 당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정영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정영은 20년간 조씨고아를 아들처럼 기르고 도안고는 조씨고아의 손에 죽는다. 거칠게 요약하면 원수를 죽이기 위해 20년간 와신상담하는 한 남자의 권선징악 성공기다.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칼로 원수를 처단하는 일견 통속적이면서 뻔한 이야기, 700년 전에 쓰인 중국의 고전이 2023년 한국에서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김성희 연극평론가는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다소 평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의리와 충심을 강조하는 원작과 달리 복수의 허무함과 삶의 비극성을 깊이 있게 다룬 점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정영의 부인은 그 '깊이'를 더하는 캐릭터다. 조씨 가문에 보은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대신 바치겠다는 정영에게 아내는 일갈한다. "그깟 약속이 뭐라고! 그깟 의리가 뭐라고! 남의 자식 때문에 제 애를 죽여요?" 고선웅 연출은 원작을 각색해 아내가 정영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하지만 '제 애'는 끝내 죽임을 당하고 아내는 정영에게 그 복수 기어이 성공하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극 속에서 정영의 복수는 더는 정영 만의 것이 아니다. 복수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복수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정영 부인을 통해 삶의 비극성과 대의(大義)의 허무함을 표현한 고선웅의 연출은 중국 공연에서도 "극의 밀도를 높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연극 조씨고아 커튼콜. 배우들이 환호했고 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사진 국립극단


극은 복수의 허무함과 삶의 비극성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전개가 빨라 흡인력이 있다. 무협 신파극을 보는 듯한 과장된 동작과 슬랩스틱 연기에 잔잔한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지고, 별다른 장비도 없는 단출한 무대에서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배우들의 호흡은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초연부터 정영 역을 도맡아온 하성광, 조씨고아 역의 이형훈, 도안고 역의 장두이 등이 이번에도 무대를 지키고, 박승화가 새롭게 조씨고아 역에 캐스팅돼 이형훈과 번갈아가며 관객을 맞는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25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볼 수 있다. 국립극단 온라인극장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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