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교관 파견 요청에 묵묵부답인 미국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김선흥 기자]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한국인들은 우방국의 선의를 쉽게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 둘도 없는 친구처럼 굴던 나라가 오늘 갑자기 등에 칼을 꽂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착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만큼 국제관계에 어둡다는 반증일까요? 아니면 둘 다일까요?
그런 일이 내가 나가사키에 머물고 있던 1886년 8월 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소위 고종 폐위 음모 사건입니다.
어느날 돌연히 극비 문건 하나가 노출되었습니다. 국왕과 재상의 인장이 찍힌 서찰의 요지인 즉, 러시아에게 군함을 보내달라, 청나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서찰을 빌미로 원세개는 고종을 폐위시켜 청나라로 압송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근대화를 추구하는 고종을 제거하고 친청사대수구파를 꼭두각시로 세우려는 계략이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그 서찰은 사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건 애초에 만들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원세개가 위조한 가짜 편지였던 겁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진실이 밝혀졌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더라면....
나는 원세개가 무언가 수상쩍은 일을 꾸밀 거라고 늘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작 나를 놀라게 한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음모의 뿌리에 주한 영국 총영사 E. Colborne Baber라는 자가 도사리고 있지 않겠어요?
그 자는 거문도를 점유하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조작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어에 능통한 그 자는 원세개와 죽이 맞아 늘 술잔을 주고 받았습니다. 두 불한당은 안보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고종을 폐위시키고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다는 데에 이해가 합치되었던 것입니다.
Baber가 피리를 불자 원세개가 춤을 춘 격이었지요. 그 과실은 친청사대수구파에게 돌아가겠지요. 진상을 알게 된 나는 신음을 삼켰습니다. '이런 죽일 X들... 이 자들을 기필코 조선 땅에서 몰아내야 해'
나는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반격에 나섰습니다.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 총영사는 술로 날밤을 지샜습니다. 그때 매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지요. 제물포 주재 영국 외교관 하나가 내게 자기 총영사를 몰어내 달라고 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아버님, 어머님.....
지난주 제물포 주재 영국 부영사가 저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상사(이곳 한양 주재 영국 총영사)를 조선에서 추방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해 왔답니다. 이 총영사라는 작자(Edward Baber)는 주구장창 방에 앉아 맥주만 마셔대고 있답니다.
그는 '好漢good fellow'이었고 중국어를 잘 구사했지요. 원씨(원세개)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와 말이 잘 통했고 그래서 총영사가 원세개의 고문 노릇을 했답니다. 청나라의 엉터리짓들이 이 주정뱅이 총영사의 혀 꼬부라진 소리 때문인 듯싶군요. 그를 추방하기 위하여 알렌 박사, 저, 그리고 다른 한두 명이 손을 썼답니다.
그는 지난주에 조선 땅에서 쫒겨났답니다. 영국의 신임 총영사 대리(EDWARD PARKER)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지금 거의 전적으로 저에게 의존하고 있답니다. 저희는 지금 조선 문제에 있어서 영국, 중국, 조선 그리고 일본을 앞지르고 있고 독일과 러시아도 저희를 무시하지 못한답니다." - 1886. 12.3 편지
고종 임금은 수년 전부터 미국정부에 군사 교관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마고 약속했던 미국 정부는 묵묵부답이었지요. 8월 고종폐위음모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은 군사 교관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습니다. 어느날 나를 불렀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어제 왕이 저를 궁으로 불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한나절 동안 왕으로부터 미국 정부가 군사 교관을 보내 주지 않는데 대하여 추궁을 당하였답니다. 죽을 맛이었지요. 우리 의회가 교관 파견을 보류해 놓고 있는 겁니다.
우리 정부에서 아무도 파견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이 가련한 소국을 망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겁니다. 만일 이 나라가 러시아나 청나라에 병탐되거나 삼켜지거나 혹은 주변국들에 의해 분할이 된다면 그 과오는 바로 미국의 약속 불이행로 인한 것일 수 있지요.
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이야기를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선 정부를 위해 복무할 결심이 확고합니다. 주거도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늦어도 석 달 안에 우리나라의 공직을 벗고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지금 저는 탈영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 정부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게만 느껴집니다.
.....
이곳 날씨는 더 없이 좋군요. 항상 청량합니다. 금년 쌀 추수는 굉장합니다. 이런 풍작은 지난 100년 동안 처음이라고들 하는군요. 아마도 삼년 먹을 쌀이 나올 거라고도 합니다. 조선에 뜻 밖의 큰 선물이지요. 배가 부르면 흉흉한 민심도 순화될 수 있겠지요." - 1886. 10. 3 편지
''아버님, 어머님...
군사 교관 문제로 조선 측으로부터 무척 추궁을 당해 왔답니다. 저는 지난 4일 우리 정부에 전보를 보내 만일 육군병이 올 수 없다면 해군이나 다른 사관을 보내 달라고 건의하였답니다. 아직 아무 회신이 없군요. 만일 우리 정부가 이렇게 계속 손을 놓고 있으면, 러시아가 움직일 겁니다. 그러면 또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왜냐면 청나라, 일본, 영국이 러시아를 극도로 불신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군사 교관을 파견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본국에 보고서를 거듭 보내 이곳의 상황을 자세히 알렸지요. 그러나 모두 쓸 데 없는 짓 같습니다. 저는 낙심천만이 되어 요즈음엔 상세한 보고서 쓰는 일도 그만 두었답니다. 지금 우리 국무성은 무능의 완결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 1886.10.15 편지
나는 당시 원소속인 해군성에 1년 휴가를 신청해 놓고 허가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답이 마침내 10월 초에 왔습니다. 해군성이 일 년 휴가를 허가하려는 참에 국무성에서 내가 공사관에 필요하다고 하는 통에 현재로선 불허된 상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참담했습니다. 조선인들도 화가 났습니다.
"조선인들은 우리 정부에 실망했고 화가 나 있답니다. 우리 정부가 약속한 군사 교관을 보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저를 이곳 정부에 봉직하게 해 달라는 국왕의 요청도 하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조선 정부는 제게 주택을 마련해 주기 위해 넓은 장소를 매입하고 진행을 시키느라 그간 상당한 비용을 지출하였답니다. 그런데 이제 건축 공사도 중단된 상태랍니다. 저의 진로가 불확실해졌기 때문이죠."
- 1886.10.15 편지
한국인 여러분,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 당시 그런 일이 다가왔습니다. 슈펠트 제독이 온 것입니다. 한미 수교의 주역이자 조선의 은인 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신임 공사가 부임합니다. 그런 상황은 나에게 공사관을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거기 어느 한 구석에 나를 삼키려는 마귀가 숨어 있을 줄이야.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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