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 지방은행]①‘업무의 신’이라던 뱅커, 어떻게 3000억대 횡령범이 됐나
‘업무에 관한 한 범접하기 어려운 신(神)적 존재.’
올해 7월 적발된 3000억원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횡령사건의 당사자 이모 BNK경남은행 전 투자금융부장(51)에 대한 은행 안팎의 평가였다. 15년간 PF 대출관리 및 대출금 관리 업무를 수행해 은행 내에 비견할 만한 인재가 없다던 그는 전 금융권은 물론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횡령범이 됐다.
서울 출신인 이씨는 1990년 고졸 채용으로 경남은행에 입사, 33년간 근무해 온 베테랑 뱅커(Banker)다. 2007년 부동산금융팀장으로 발령받은 이래 올해엔 투자금융기획부장까지 승진하는 등 약 15년 5개월간 부동산 PF 대출계약 및 대출금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씨는 경남은행 내에서 매우 유능하고 신뢰받는 은행원으로 평가 받았다고 한다. 지역 금융권 한 관계자는 “(이모씨가) 행내에서 업무상으로 범접하기 어려운 대단한 선배로 평가 받았다” “처음 사고가 알려졌을 때도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신망도 두터웠던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평소 그는 전문성과 특유의 인덕으로 주변의 인심을 사는 타입이었다고 전해진다. 업무가 몰리는 월말이 되면 직접 나서 후배들의 업무를 덜어주는가 하면, 넉넉한 재력(?)을 기반으로 주변에 베푸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랬던 그는 어떻게 규모만 약 3000억원에 이르는 횡령사건을 일으키게 됐을까.
부임한 지 1년도 안돼 횡령시작…사건 덮으려 또 횡령
19일 아시아경제가 국회를 통해 확보한 이번 사건 공소장을 보면 이씨가 첫 횡령을 저지른 시점은 2008년 7월 하순이다. 부동산금융팀장으로 재직하기 시작한 게 2007년 12월 24일이었으니 불과 7개월여 만에 횡령을 시작한 것이다.
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당시 시행사 A사가 충북 음성군에서 추진 중이던 골프장 개발사업과 관련해 경남은행 PF 담당자이던 이씨는 대주단이 대출해 준 200억원을 관리하던 중 2008년 7~8월에 걸쳐 50억원을 빼돌렸다. 이씨는 공범인 대형 증권사 직원 황모씨(52)를 통해 해당 횡령금을 처남 명의 계좌를 거쳐 부인, 처제, 동생 등 다른 가족 명의의 계좌로 송금, 차명투자를 시작했다. 이후로 이씨는 2014년 1월 말까지 해당 사업에서만 186억원을 빼돌렸다.
하지만 횡령금을 활용한 투자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2014년 1월 말까지 이씨가 기록한 투자손실액은 55억9000만원에 달했다. 횡령 규모가 본격적으로 커진 것도 이때부터다. 거액의 투자손실을 만회하고, 임의로 빼돌린 자금을 다시 채워놓기 위해 이씨가 관리하는 또 다른 PF 사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허위문서 조작해 대출금·대출원리금 상환액 빼돌려
수법은 대체로 비슷했다. 여러 PF 사업의 대출금에 손을 대거나, 시행사나 신탁사가 대출원리금 상환 명목으로 내는 상환금액을 서류 조작으로 빼돌려 이씨와 황씨, 부인 명의로 설립한 페이퍼컴퍼니의 계좌로 송금해 또 다른 투자를 기획했다. 통상 PF 사업 시엔 대출금의 무단이용을 막기 위해 주관은행이 통장을 보관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이를 악용한 것이다.
2016~2017년경 횡령이 이뤄진 서울 광진구 소재 공동주택 사업을 보면, 이씨는 미리 보관 중이던 사업자 B사(특수목적법인)의 법인인감과 대표이사의 명판을 이용, 허위 출금전표를 작성해 황씨에게 전달했다. 황씨는 경남은행 지점에서 마치 B사 직원인 양 행세하며 신탁사 C사가 송금한 대출원리금 상환자금을 빼돌려 이를 가족·페이퍼컴퍼니의 계좌로 옮겼다. 횡령금은 때에 따라 1억여원에서 많게는 77억여원에 달했다.
경기 의왕, 의정부 등지의 사업에서도 이런 수법이 동원됐다. 의왕에서도 시행사 D사와 PF 계약을 체결한 신탁사 E사가 내는 대출원리금 상환자금을 횡령했다. 이씨는 우선 D사 명의의 계좌를 2개 개설했다. 1개의 계좌거래신청서로 2개 계좌까지 개설이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어 그는 여러 장의 허위 출금전표를 마련했고, 황씨는 전처럼 D사 직원임을 가장해 수 차례에 걸쳐 194억원가량을 빼돌렸다.
대출한도가 남아있는 것을 악용하기도 했다. 이씨는 경기 광주시 사업과 관련해선 시행자 F조합의 대출한도가 375억원가량 남아있다는 점을 활용, 임의로 보관하던 법인인감 도장을 통해 계좌거래신청서, 사업비 자금인출 요청서, 출금전표 등을 각각 위조했다. 해당 사업과 관련해 이씨가 대출금, 대출원리금 상환금액서 빼돌린 돈은 약 789억원에 달했다. 이들은 은행 창구에서 담당직원이 송금 명목을 물어볼 경우 ‘토지대’로 답변하기로 입을 맞추는 치밀함도 보였다.
의정부에서도 사업자가 설립한 G·H사(특수목적법인)의 대출계약 한도가 650억원가량 남아있다는 점에 착안해 허위 대출을 실행했다. 앞서 언급한 F조합 관련 횡령금을 변제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이씨는 자신의 노트북 등을 이용해 허위 대출금 인출통지서, 대출실행요청서를 만들었다. 이씨는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후배직원에게 허위 문서들을 주고 대출을 실행하는 업무처리 요청서를 기안토록 했다. 허위 대출로 발생한 대출금은 이씨의 페이퍼컴퍼니 계좌에 공사비 명목 등으로 송금됐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사고자가 행내 PF 전문가로 분류됐고 신뢰를 받는 인물이었던 만큼 부하직원들도 이렇다 할 의문을 가지거나, 의문이 있더라도 이의제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따지고 보면 일을 대신해준다거나 하는 선행들이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고 짚었다.
금융감독원에선 이에 따른 총 횡령금액이 17개 사업장 298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출금 횡령으로 5개 사업장에서 13회에 걸쳐 1023억원을, 대출원리금 상환자금 횡령으로 16개 사업장에서 1965억원을 빼돌린 것이다.
우연히 드러난 횡령…도피자금 은닉하고 해외도주 기도
이씨의 죄상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예금보험공사가 2012년쯤 파산한 저축은행들의 채권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과정에서 무산된 한 PF사업과 관련한 수상한 정황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예보는 검찰에 이씨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고, 이어 금융계좌 압수수색이 시작되면서 경남은행과 금융당국도 순차적으로 사건을 인지하게 됐다.
4월 중순 대기발령 조치를 받은 이씨는 7월께 금감원의 검사가 시작되자 돌연 자취를 감췄다. 잠적과정도 주도면밀했다. 경남 사천, 대구, 강릉, 하남, 서울 등을 전전하면서 수사망을 벗어나려고 하는가 하면, 도주 중엔 서울 강남, 송파, 경기 하남 소재 오피스텔 3곳을 차명으로 계약해 은신처로 삼았다. 각 은신처엔 한화 약 46억원, 미화 5만달러, 상품권 4000만원어치, 골드바 1㎏ 101개(시가 101억원 상당) 등을 분산해 은닉했다.
추가 수사 과정에선 이씨가 해외 도피를 염두에 둔 정황도 발견됐다. 은닉재산을 추적하던 검찰이 이씨가 미국 이민을 계획하면서 투자 이민금 명목으로 미국에 송금한 55만달러(약 7억원)를 발견한 것이다. 법원은 해당 금액을 동결하는 추징보전 인용 결정을 내렸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보면 횡령에 얽힌 PF 사업 대부분이 표면상으론 정상적으로 진행됐던 만큼, 언젠가는 터졌겠지만 (외부에서) 인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대다수 횡령 사건을 보면 횡령범들은 언젠가는 전말이 밝혀질 것을 예상하고 대비책을 마련한다. 사고자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주도면밀하게 대책을 마련한 게 아닌가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지역 금융권 관계자는 “다른 지방은행도 (PF대출 관련) 전문인력이 최소 3~4명은 되는데, 경남은행의 경우 이모씨가 거의 유일한 수준이었다고 한다”며 “특정인에 대한 의존도가 컸던 게 문제”라고 전했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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