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랑] 암세포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신경내분비종양’을 아시나요?
췌장암으로 오인 가능한 ‘신경내분비종양’
이진해씨가 처음 신경내분비종양 진단을 받은 건 2004년 5월입니다. 국가 암 검진으로 초음파 검사를 받다가 이상 소견을 들었습니다. 곧바로 정밀 검사를 실시했고 12cm 크기의 종양이 췌장에서 발견됐습니다.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췌장과 주변 임파선에 암이 퍼진 상태였습니다. 수술을 위해 정밀 검사를 하던 중, 췌장암이 아닌 신경내분비종양인 것으로 최종 확인됐습니다.
신경내분비종양은 호르몬을 분비하는 신체 기관인 내분비계 세포에 생기는 종양입니다. 분화도가 좋은 암일 때는 신경내분비종양으로, 암세포 증식 능력이 활발하며 분화도가 나쁜 암일 때는 신경내분비암이라고 부릅니다. 신경세포가 있는 몸 어디에든 발생할 수 있어 췌장암·위암·직장암 등 다른 암과의 구분이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췌장에 생긴 신경내분비종양을 췌장암으로 오인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병에 대해 많이 알려지면서 오진되는 경우가 줄었고, 그 때문에 2011년 약 250명으로 추정되던 국내 신경내분비종양 환자 수는 2020년 약 2500명으로 폭증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신경내분비종양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 국내 전체 신경내분비종양 환자 수, 생존율, 사망률 등 관련 통계가 미비한 실정입니다.
신경내분비종양은 암의 위치, 분화도, 종양 크기, 전이 여부 등 다양한 특성에 따라 치료법이 달라집니다. 원격 전이가 없고 한 곳에만 암이 위치해 있는 1기의 경우, 수술적 절제로 완치가 가능합니다. 정기적인 검진으로 추적 관찰만 잘한다면 수술 후 5년 생존율이 86.5%입니다. 무증상으로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된 4기는 생존기간 6개월 정도인데요. 하지만 이때에도 표적 치료제, 간동맥화학색전술, 펩티드수용체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PRRT) 등과 같은 핵의학과 치료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경우, 종양 진행 속도를 80%까지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대 MD 앤더슨 암센터 통계에 따르면 신경내분비종양 4기 환자의 5년 생존율은 68%입니다. 신경내분비종양은 종양의 변화를 정기적으로 관찰하며 필요할 때에만 치료를 진행합니다. 분화도가 매우 좋은 일부 환자는 2~3년, 어떤 경우는 8년까지 종양 크기가 커지지 않고 유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듯 신경내분비종양의 느리게 자라는 특성 때문에, 5년이 지난 이후에도 암세포를 갖고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주기적인 관찰은 필수입니다.
이진해씨는 이런 신경내분비종양 진단을 받고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암이라는 말에 놀라기도 했거니와 흔히 알고 있던 암에 비해 더욱 어려운 암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47년갑(47년 동안 하루 1갑) 흡연자이긴 했지만, 평소 근력운동과 등산을 즐겨 하기 때문에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종양 크기가 12cm라는 말을 듣고는 ‘생을 정리해야겠다’며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열심히 살던 젊은 날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앞으로 6개월은 살 수 있을까’ 싶어 괴로웠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던 김씨를 붙잡은 건 가족입니다. 가족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밤낮 가리지 않는 구토… 항암제 복용 중단까지
2004년 6월, 이진해씨는 췌장 절반과 주위 림프절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신경내분비종양은 암 부위, 종양 크기, 전이 여부 등에 따라 치료법이 달라집니다. 초기의 경우 수술, 방사선 치료로 국소 치료를 하지만, 이씨처럼 전이가 동반되면 세포독성·표적 치료제와 같은 핵의학 치료를 진행합니다. 수술이 끝난 후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이씨는 총 29번이 넘는 항암 치료와 6번의 간동맥화학색전술을 받았습니다. 종양 크기를 줄이고자 이씨는 2013년부터 항암제 산도스타틴라르 주사와 경구 표적항암제 수탄, 아피니토를 복용했습니다.
거듭된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온몸 구석구석 뼈가 시리고 아픈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구내염과 구토가 너무 심해 물 한 모금 마시기조차 힘들었습니다. 낮밤 가리지 않고 화장실을 드나들며 구토를 하느라 같은 병실 환자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항암제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심해, 항암 치료를 위해 입원을 준비하는 전날부터 구토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씨는 ‘이런 삶을 사는 게 정말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항암제 복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항암 치료를 중단한 지 채 한 달도 안 된 2017년 9월, 종양은 더 빨리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의료진의 말에 또 절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경내분비종양 환우회 카페를 발견했습니다. 지금의 주치의인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강건욱 교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신경내분비종양 치료 효과가 높은 방사선의약품 루타테라 치료를 위해, 강건욱 교수가 환자들을 말레이시아 병원으로 연결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희망의 끈’ 강건욱 교수
강건욱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2017년 12월, 이진해씨는 말레이시아 비컨병원에서 첫 루타테라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섯 시간 넘게 걸리는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해외 치료는 이씨에게 큰 부담이었지만, 다행히 치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루타테라 치료를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계속 커지기만 하던 종양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았습니다. 부작용도 적었습니다. 치료 후 약간의 메스꺼움과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이전에 비하면 견딜 만했습니다. 2018년 6월까지 말레이시아에서 해외 루타테라 치료를 4회 받았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치료받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강건욱 교수에게 가 진료를 받았습니다. 루타테라는 2020년 3월, 국내에 도입돼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는데요. 이후부터 이씨는 현재까지 서울대병원에서 루타테라 치료를 1년 반 주기로 총 6회 더 받았습니다. 루타테라 시술 이후에는 종양의 크기가 비교적 천천히 자랐습니다.
<이진해씨>
“신경내분비종양의 특성상, 지금도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치료중이며 종양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이 상태로 멈춰주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도 비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일하고 가족들과 밥을 먹는 소소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운동도 꾸준히 하고 식단에도 신경을 씁니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등산도 다닙니다. 몸에 암세포가 있어도 살아가는 동안에는 열심히 살아야지요!”
-일을 꾸준히 하고 계시다고요?
“일하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오히려 출근하면서 삶의 활력을 얻습니다. 처음 암 진단을 받고, 주변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건강을 돌보라고 많이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3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쉬는 건 무의미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업무 부담이 비교적 적은 지방 근무를 자처해 강원도에서 9년간 근무 중입니다. 정년퇴임 후인 2019년에는 개인 세무사 사무소를 개업했습니다.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는 데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일을 하면서 몸을 계속 움직인 덕분인지, 항암 치료 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루타테라 치료를 지금도 받고 계신가요?
“지금은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아닙니다. 저는 국내에서 루타테라 치료를 총 여섯 번 받았습니다. 건강보험 적용으로 두 번, 그 이후로 제약회사 지원으로 한 번, 그리고 나머지 세 번은 전액 자비부담으로 진행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치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허가한 치료 횟수를 초과했기 때문입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4회, 자비 치료 2회 이후로는 치료가 금지돼 있습니다. 만약 제 종양이 자라서 또 다시 이 치료가 필요한 시점이 오면 그때는 말레이시아로 다시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사실 이런 현실 때문에 투병이 더 힘듭니다. 저뿐 아니라 추가 치료가 필요한 다른 환자들도 아픈 몸을 이끌고 해외로 나가야만 하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만 명의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들이 국내에 있는데요. 원활한 치료를 위해, 하루 빨리 제도가 개선되면 좋겠습니다.”
-다른 암 환자들에게 한 말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종양 크기를 줄이고자 무리하게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신 환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초반에는 치료 효과가 좋았지만 오랜 투병생활로 몸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작용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저처럼 종양을 가지고도 꾸준히 치료받으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평생 함께 가야 하는 암이라 생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세요. 좋은 항암제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으니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강건욱 교수>
“간 속 종양의 크기는 3cm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2018년 9월보다 80~90%가 사라진 정도로, 치료 효과는 큽니다. 이진해씨는 종양 성장 속도가 느린 편에 속합니다. 1.6년 주기로 루타테라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지금처럼 꾸준히 병원에 오셔서 검사받고 건강한 생활을 이어가신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종양은 있지만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으면 종양의 크기가 유지되거나 작아져서, 남들만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진해씨가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신경내분비종양과 같은 희귀암은 진단과 치료법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본인 암과 증상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해야만 그에 맞는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진해씨는 평소 본인의 암과 건강상태에 대한 인식이 매우 높으십니다. 이씨처럼 주치의를 믿고 주치의와 많은 것을 상의하고 공유하시다 보면 최적의 치료 방법을 찾게 될 겁니다. 또 식사와 운동을 열심히 하시며 힘든 항암 치료를 잘 따라 와주셨습니다.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 매우 힘든 루타테라 시술을 총 10번 받는 동안 잘 견뎌내 주셨습니다. 이진해씨가 신경내분비종양 환우의 본보기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경내분비종양 환우회의 ‘기둥’이시라는 말을 들었다.
“핵의학 전공자로서 갑상선암을 전문으로 진료해왔습니다. 평소 해외 학회를 주기적으로 다니기에 독일에서 진행되는 신경내분비종양 치료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독일로 원정 치료를 가는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들의 고충을 덜어주고자 신경내분비종양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을 위해 바뀌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루타테라 치료도 그렇습니다. 치료 횟수에 제한이 있어서, 환자들은 해외로 원정 치료를 나가야 합니다. 종양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분들이 감내하기엔 버거운 현실입니다. 의사보다는 환자 집단의 목소리가 커야 법이 바뀌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환자들에게 환우회를 만들어 달라 요청했습니다. 환우회 조직이 결성되며 환우회분들과 다 같이 힘을 내고 있습니다. 희귀암 치료가 수월해지는 그날까지, 신경내분비종양 환우회를 돕고 싶습니다.”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들에게 한 말씀.
“신경내분비종양은 완치가 어려운 암입니다. 암세포를 갖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병이라서 정기검진과 꾸준한 건강관리가 필수입니다. 혹여 종양 크기가 커졌다하더라도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채식이 좋다’ ‘저걸 하면 안 된다’ 같은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마세요. 평소 본인 입맛에 맞는 음식이면 뭐든 열심히 먹고 즐겁게 사시면 됩니다. ‘환자’가 아니라 ‘건강인’이라 생각하며 생활하세요. ‘암 환자’라는 틀이 오히려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긍정적으로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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