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호민론' 편 허균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허균(許筠,1569~1618)은 1607년 3월 삼척부사로 부임한 지 13일 만에 불교를 믿는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났다. 시대의 선각자는 이렇게 하여 권력으로부터 멀어졌고 소외된 일탈자의 길을 걸었다.
허균의 호는 교산(蛟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 등으로 불린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당대 손꼽히는 명문가인 허엽(許曄)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허성(許筬)·허봉(許篈) 역시 당대의 재사이고 동생 허난설헌은 시와 그림으로 중국에까지 널리 소개되었다.
<홍길동전>의 작가로 더 알려진 허균은 조선에 천주교를 소개한 선각자로, 실학의 대종(大宗)으로도 손꼽히는 학자이다. 이런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그는 반역아, 패륜아라는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는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가 왕권에 반역했을 뿐만 아니라 고루하고 형식화된 성리학체제에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儒)·불(佛)·도(道)·무(巫), 그리고 천주교까지 수용하는, 사상의 폭이 넓은 당대의 보기 드문 학자이고 경세가였다.
조선왕조 5백년을 통틀어 그렇게 다양한 사상을 신앙과 학식으로 습득한 유일한 인물이 허균이다. 그가 만약 반역죄로 처형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루소(Jean JacquesRousseau, 1712~1778)에 필적하는 자유사상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모든 반역아·이단자·풍류객이 그렇듯이 그 역시 명예와 폄훼가 함께한다. 명문가 출신의 수재이면서 사림(士林)들이 질겁을 할 정도로 방자한 언행, 절제 잃은 경박자, 고독한 불청객, 반역을 꾀한 역적이란 평이 따랐다. 한편으로는 다정다감하고 세속적인 가식을 싫어하는 파격자, 성품이 호탕한 의협인, 혁명을 꿈꾼 개혁가, 진취적 자유주의자, 근대적인 시민정신의 구현자, 선구적인 휴머니스트라는 평가가 더욱 많았다.
그는 <화도원량귀거래사(和陶元凉歸去來辭)>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처세에는 졸렬해 지금까지 반생에도 머리가 다 빠질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독서를 좋아하여 방을 정히 쓸고 책 만 권을 쌓아 두고 그 가운데서 즐거워한다. 여러 차례의 옥수(獄囚), 좌천 중에도 모두가 낙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 않고 속물들과 더불어 있을 때에는 시끄러워 책을 펼 수가 없다. 높은 집에서 맛 있는 음식을 먹고, 화려한 좌석에 앉아 있으면 마치 큰 칼을 쓰고 화택(火宅)에 들어간 것 같다.
허균이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기질을 갖게 된 것은 서얼 출신 이달(李達)에게서 받은 영향이 크다. 이달은 뛰어난 글재주를 가졌지만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불우한 서생이었다. 허균은 이달을 스승으로 삼아 글공부를 했다.
그는 성장하면서 서얼들과 자주 어울렸다. 후일 여강칠우(驪江七友)라 하여, 박응서(朴應犀, ?~1623) 등 명문고관의 서자들끼리 소양강 상류에서 작당, 옛 죽림칠우에 비기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낸 소외된 지식인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의적을 자처하여 부자의 재물을 털다가 붙잡혀 대역죄로 계축옥사(癸丑獄事) 때에 대부분 처형되었다.
▲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 나무위키 |
허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홍길동전>이란 소설을 통해 부패한 권력에 도전하는 간접 저항의 길을 찾기도 하고, 민중의 저항을 체계화시키는 <호민론>을 저술하여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호민론>은 현대적 민중의 역할을 수백 년 앞질러 내다 본 탁설이다. 천하에 가장 무서운 존재는 오직 민중뿐이라고 단언하면서 민중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의 세 종류로 나누었다. 항민은 관의 지시에 순종하면서 원만하게 살아가는 부류, 원민은 관의 탄압과 착취에 원성을 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부류, 호민은 비판과 저항의 마음을 품고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원하는 바를 일거에 이루려고 하는 저항 계층을 말한다.
허균은 이 호민을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진승(陳勝)·오광(吳廣), 한나라 말기의 황건적, 당나라 말기의 왕선지(王仙芝, ?~878), 황소(黃巢, ?~884) 등을 들고, 조선에서는 진훤과 궁예를 들었다. 허균은 자신의 작중 인물인 홍길동을 이런 호민으로 상징하여 등장시켰으며, 스스로는 왕조 타도의 거사를 기도하였다. 그는 호민이고 열혈의 혁명아였다.
함열과 부안의 귀양살이는 그의 생애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함열에서는 국문학사상 금자탑인 <홍길동전>을 지었다. 당시 언문이라 하여 천시받던 한글로 저항 소설을 써서 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내보였다. 부안에서는 여류 시인이요 기생인 계생(桂生)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성품이 더럽고 거칠어서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아첨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시도 참지 못하고, 이야기가 세력가를 칭찬하는 데에 미치면 입이 머뭇거려지고, 권세 있는 집의 대문에 이르면 걸음이 갑자기 얼어붙고, 높은 사람에게 절하려면 몸이 기둥처럼 뻣뻣해진다. 이런 떨떠름한 모습으로 높은 사람들을 보니 사람들이 금방 나를 미워해서 내 무례를 나무라려 든다.
허균이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자평하는 글이다. 이런 저항적이고 올곧은 성격 때문인지 그에 대한 평판은 상당부분 부정적이다. 옥에 갇혔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옥문을 깨고 탈옥시키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서문 저자거리에서 효수당할 때는 그를 흠모하던 형리 한 사람이 그의 목을 훔쳐 장사 지내려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한 바 있다.
그는 단순한 불평객은 아니었다. 방일한 생활에서도 쉼없이 학문에 정진하고, 현실의 모순을 혁파하고자 노력하는 선구적인 학자이자 개혁주의자였다. 특히 국방에 관심이 높았다. 장차 여진(女眞)이 침입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든든한 국방과 대비책을 촉구했다. 남대문에 격문을 붙여 여진과 서양인의 침입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이 '남대문괴서' 사건으로 허균은 유언비어 죄로 잡혀 들어갔다. 예언대로 그가 죽은 지 9년 만에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묘호란이, 18년 만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허균을 역적으로 몰아 처단한 조선왕조의 사서(史書)에는 그를 '경박자', '선동꾼' 등으로 몰아치고 있지만, 왕조 5백년 역사에서 그만큼 사상과 행동의 스케일이 큰 인물도 흔치 않았다.
그의 인간적인 품성이나 인생관은 자작시 <누실명(陋室銘)>에 잘 나타나고 있다.
방 넓이는 손바닥만하고, 남쪽으로 두 문이 열렸네
낮 해가 와 비치면 밝고 따스하이
집은 비록 바람벽을 둘렀을 뿐이나
서적은 사부서(四部書)를 쌓았네
남은 것 쇠코잠방이 하나, 다만 농옥(弄玉)이가 옆에 있네
차를 반 항아리 다리고 향 한 자루 피웠네
벼슬에서 쫓겨나 건곤과 고금을 우러러보고 굽어보고
사람들은 누실이라 살지 못하리라 하지만
내가 보기엔 천상세계와 같네
마음과 몸이 편안하니 어찌 누스럽다 하리오
내가 누스럽게 여기는 것은 몸이나 이름이 아울러 썩는 것
혹시 다북쑥이 우거져 우거하는 집이 파묻힌다 해도
군자가 이어 거(居)하면 어찌 누하다 하리오.
허균은 광해군 10년(1618) 8월 50살 되던 해, 모반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는 썩은 정치와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사대부 출신이면서 불우한 처지의 서얼들과 어울려 거사 준비에 나섰다. 박응서·심우영 등 십여 명을 모아 무술을 익히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 은밀하게 혁명을 꾀했으나 결국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허균은 평탄한 출세길보다는 민중의 처지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며 다른 사대부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신분제도라는 틀 때문에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서얼들과 일반 평민들을 동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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