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석유가 쏟아졌다, 불행이 찾아왔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탓에, 맨땅에서 석유가 분출하는 모습은 부럽고도 경이롭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원제 Killers of the Flower Moon) 초반 장면도 그랬다. 때는 20세기 초, 석유가 나온 땅 주인은 미국 원주민 오세이지족이다.
덕분에 이들의 삶은 여느 미국 영화 속 원주민에게서 본 적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운전기사가 모는 고급 자동차를 타고 쇼핑을 나서는 게 일상이다. 담요를 두른 듯 보이는 여성들의 전통 옷차림에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넉넉해진 살림처럼 행복도 커졌으면 좋으련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거나 시름시름 앓다 죽는 사람들이 이어진다.
장장 206분에 걸쳐 영화는 전쟁에서 돌아온 백인 남성 어니스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오세이지족 여성 몰리(릴리 글래드스톤)의 로맨스와 더불어 몰리네 가족에게 닥쳐오는 비극과 그 실체를 그린다. 어니스트의 친척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은 오세이지족과도 가족 같은 사이인데, 실은 지독한 악인이라는 게 드러난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실화가 바탕이다. 언론인 출신 작가 데이비드 그랜이 쓴 논픽션이 영화의 원작이다. 배우와 감독의 면면에 더해 영화의 만듦새와 강렬한 주제를 알게 되면 내년 아카데미상 후보를 점치는 건 어렵지 않다.
이 영화를 두 달 전 극장에서 봤다. 애플TV 오리지널 작품이지만 OTT로 직행하지 않고 미국과 한국 모두 극장에서 개봉했다. OTT 애플TV+에 공개된 건 이달 초. 극장 개봉 이후 대략 45일 이상이 지난 다음이다. 이런 45일의 홀드백, 즉 극장 개봉 이후 다른 창구에 공개되기까지의 기간은 기존 미국 극장가의 기준에선 짧은 편이지만, 적어도 ‘무늬만 개봉’은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OTT 전에도 TV와 홈비디오 등이 경쟁자로 등장할 때마다 이를 적대시하다 결국 공생의 길을 찾곤 했다. 극장 개봉 이후 홀드백을 두고 TV 유·무료 채널이나 홈비디오 등에 순차적으로 영화를 공개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극장 수입에 이런 부가시장 수입이 더해져 전체 시장도 커졌다.
최근 한국 영화계는 부가시장 이전에 극장부터 침체기가 거듭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홀드백이 붕괴해 개별 영화의 손익 계산과 별개로 시장 전체의 타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국회 문체위 소속 여야 의원 2인과 한국영화관산업협회 등이 마련한 토론회는 제목부터 ‘홀드백 법제화’를 내걸었다. 시장 자율 대신 법적 규제를 도입하는 데는 여러 이견도 있을 법한데, 영화산업이 지속하려면 OTT와도 새로운 균형점과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참고로 ‘플라워 킬링 문’은 내년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는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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