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해외 순방의 그 순간 [김선걸 칼럼]
2015년 10월 13일이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세 번째 미국 방문을 위해 워싱턴으로 떠나는 전용기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자학 개그’에 출입기자들은 뜨악했고 옆의 청와대 참모들은 당황했다. 당시 취재수첩의 메모로 과거를 호출하니 복잡했던 그때 국내 상황도 같이 떠올랐다. 실제 순방은 코피가 터질 정도로 강행군을 했지만 당시에도 국정의 핵심은 결국 국내 문제였다.
대통령 순방은 보통 투자 유치 MOU(양해각서) 체결이나 수출 확대, 무역 협정 등 성과가 화려하다. 그러나 국내에 들어오면 골치 아픈 현실에 ‘현타’가 온다. 위의 대화를 했던 2015년 당일도 박 전 대통령은 순방 일정까지 미루며 계획에 없던 오후 수석비서관 회의를 소집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 논박한 후 오후 3시에 전용기를 탄 참이었다.
그해 4월 20시간 걸리는 중남미 4개국 순방을 떠날 때는 더했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로 정가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결국 해외 순방 중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하는 초유의 사태가 났다. 박 전 대통령은 순방 때 고산증 후유증으로(첫 기착지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는 해발 2640m였다.) 귀국 후 공항에서 병원으로 직행하기까지 했다. 무리한 일정 탓도 있었겠지만 아마 순방 내내 국내 걱정에 머리가 지끈지끈했을 것이다.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 전 대통령도 정도의 차이일 뿐 다 비슷했다. 해외에서는 ‘K컬처 보유국’ 정상으로 예우받는다. 특히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로 수십조원의 MOU를 맺으며 사명감과 보람이 분출한다. 그러나 귀국하는 비행기부터 두통이 몰려온다. 국내 정치에서 편했던 대통령은 아무도 없었다. 노무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까지 경험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초기부터 광우병 괴담에, 문재인 전 대통령은 무리한 정책 실패의 수렁에 빠져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심기 경호에 능한 노련한(?) 참모일수록 자주 해외 순방을 권한다. 꼭 나쁜 뜻은 아니다. 난제를 잠시 잊고 국가에 생산적인 일을 하자는 거다. 단지 그러다가 국내 문제를 방치해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순방을 가서 노는 대통령은 없다. 사명감과 긴장감이 합쳐져 국내에서보다 두세 배는 열심히 일정을 소화한다. 코피가 터지고 ‘링거 투혼’을 발휘한다. 역대 대통령들이 공통적으로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자기는 코피 터져가며 해외에서 성과를 이뤄냈(다고 생각하)는데 국민들에게는 전달되지 않고 가십만 회자되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해법도 없는 복잡한 국내 정치 문제는 회피한다. 지나고 보면 국내에서 보기 싫은 국회의원 한 명이라도 더 설득하는 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순간도 꽤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떨까. 요즘 야당은 순방에 몇억원 더 썼다고 트집을 잡지만 그건 억지다. 정상회담은 최소한 그 수십, 수백 배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최절정의 국가 활동이다. 예를 들어 2009년 말 UAE 원전 수주를 극적으로 한국이 따낸 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여섯 차례에 걸친 전화와 현지 정상회담 덕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미국 W부시 대통령과 티격태격 하면서도 정상회담 네 차례를 통해 이라크 파병, 한미 FTA를 결단했다. 한국에 막대한 국익을 남겨준 선택임이 증명됐다.
순방을 언제 어떻게 가야 하나. 이건 외교 라인도, 경제 라인도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일반 국민의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이 정무 감각을 갖고 결정할 문제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9호 (2023.12.20~2023.12.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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