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 대신 ‘낭만’…슬로우 게임 바둑 찾는 MZ세대 [가봤더니]

이영재 2023. 12. 1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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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대, 낭만적인 게임 바둑에 관심 증가
주말에 열린 컴투스타이젬배 동호인 대회 성황
‘바꿈’ 멤버로 구성된 타개링 팀은 4위 입상
지난 16일 서울 강남 인근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올댓마인드’에서 동호인 대회가 열렸다. 사진은 이날 행사에 ‘응원’차 방문한 바둑 소모임 ‘바꿈’ 멤버들.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효민⋅권희정⋅박욱경⋅박성현(모임장). 사진=이영재 기자

최근 몇 년간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던 이른바 ‘갓생’ 문화가 지고 다시 ‘낭만’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는 가수 ‘우즈(조승연)’가 만들어 유행시킨 ‘굳이 데이’가 최근 화제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굳이 데이는 ‘귀찮더라도 낭만적인 일을 찾아서 하는 날’을 의미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 세대에서 소위 ‘오글거린다’며 회피할 법한 일들을 굳이 찾아서 하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이다.

낭만 하면 빠질 수 없는 종목 중 하나가 바로 바둑인데, 이와 같은 최근 분위기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기원에서 담배를 피며 바둑을 두던 것은 이제 옛말이 됐고, 분위기 좋은 카페를 대관하거나 복합문화공간 등을 활용해 바둑을 즐기는 문화가 MZ세대들 사이에서 확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6~17일 주말 이틀 동안 서울 강남 인근 ‘올댓마인드’에서 게임사 컴투스타이젬이 주최하고 대한바둑협회가 주관,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후원을 맡은 2023 컴투스타이젬 전국 동호인 팀 최강전이 열렸다.

대회 당일 현장에는 최강 동호인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갈고 닦은 기량을 과시하려는 참가자 외에도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바둑 대회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응원단’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소모임 ‘바꿈’에 소속된 멤버들로, 바꿈이란 ‘바둑으로 꿈꾸고 세상을 바꾸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대회 참가자가 아니었음에도 현장을 방문해 응원전을 펼친 바둑 동호인 3명을 만나 바둑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된 배경을 들어봤다.

2023 컴투스타이젬 전국 동호인 팀 최강전 대회장 전경. 사진=이영재 기자


생각을 깊이 하고 싶어서 바둑을 시작하게 됐다는 김효민(31) 씨는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고 운을 뗐다. 바둑을 시작한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김 씨는 지난 9월 16일 처음 바둑을 배웠는데, 이날이 마침 딱 3개월 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주변에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도 ‘운명적으로’ 바둑을 시작하게 됐다는 김 씨는 ‘바꿈’에 와서  가장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대목으로 “저는 바둑이 돌을 서로 잡아먹는 게임인 줄 알았는데, 모임장님이 집을 짓는 게임이라고 설명했다”는 점을 꼽았다. 이어 “내 집을 튼튼하게 잘 지어야 된다는 것도 좋고, 상대방 집을 없애는 것도 너무 좋아서 열심히 했다”고 말했는데, 이 대목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도 흥행한 드라마 ‘더 글로리’에 종종 등장하는 송혜교의 바둑 관련 대사와도 관련이 깊다.

김 씨는 “제가 평소 낯을 가리는 편인데도 이 모임은 굉장히 편안했다”면서 “처음 바둑을 접하시는 분들도 오셔서 어렵지 않게 적응하시면서 좋은 취미를 가지실 수 있을 것”이라고 바둑 모임을 추천했다.

바둑을 배워보고 싶어서 혼자 AI와 대국했다는 권희정(33) 씨는 “AI는 말을 못하니까, ‘너는 왜 거기에 뒀니’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면서 “사람과 바둑을 두고 싶어 찾아보다 바꿈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권 씨는 “처음에는 바둑을 가르쳐주시는지도 모르고 왔다”면서 “‘재능 기부’로 바둑을 가르쳐주시는데, 기초부터 차근차근 알려주셔서 바둑에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됐고,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정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바꿈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바둑 동호회에서 입문자를 대상으로는 별도의 수강료를 받고 있지 않다는 점도 바둑을 취미로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로서는 한 번쯤 고려해볼만한 점이다.

권 씨는 “한국 바둑의 전설 이창호 9단과 일본 요다 노리모토 9단의 대국을 최근 현장 공개 해설로 함께 했다”면서 “프로기사들이 직접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니 배우는 것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아서 오늘은 ‘선생님(바꿈 모임 내 기력이 강한 멤버들)’들을 응원하러 현장을 찾았다”며 웃었다.

이어 “코로나 이후 실내에서 소규모 인원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필요해졌는데 마땅한 것이 별로 없다”면서 “바둑은 이런 점에서도 매우 좋은 취미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에 응한 김효민⋅권희정 씨가 바꿈 멤버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이영재 기자

박욱경(35) 씨는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 보니 바둑에 인생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박 씨는 “바둑에 대해 늘 궁금했지만 주변에 바둑을 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접할 기회가 없는 상태로 몇 년이 지났다”고 돌아봤다. 그러다 갑자기 문득 ‘노후 대비’ 활동 차원에서라도 바둑을 배워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는 박 씨는 “지금부터 바둑을 배워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둑을 둘 수 있는 공간을 알아봤다”고 말했다.

그러다 박 씨 눈에 띄게 된 것이 바로 바둑 소모임이었다. 박 씨는 “즐기는 기분으로 편하게 접근하려 했던 마음과도 가장 잘 부합하는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소모임 어플 등에서 바둑을 검색하면 여러 곳이 나오는데, 이 중 바꿈은 현재 활동 인원 200명을 돌파하는 등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회에 출전한 바꿈 멤버들과 응원단이 함께 모여 포즈를 취했다. 사진=이영재 기자

바둑 소모임 바꿈의 모임장을 맡고 있는 박성현(34) 씨는 “매주 토요일 정모를 갖고, 바둑을 둔 이후에는 다 함께 뒤풀이를 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프로기사들이 펼치는 바둑리그처럼 바꿈에서도 ‘바꿈바둑리그’를 개최한다”고 말했다.

박 씨는 “바꿈바둑리그 또한 각 팀에 감독이 배정되고, 감독들은 드래프트를 통해 선수를 뽑는다”면서 “8개팀 더블리그로 약 3~4개월 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이 밖에 소소한 대회들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수시로 열린다”고 덧붙였다.

한편 컴투스타이젬 주최로 열린 이날 동호인 최강전은 한수두실분(황인욱⋅신상준⋅김다올) 팀이 결승에서 오민(박지수⋅이용빈⋅서상기) 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 참가 선수들은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도 다수 포함돼 있어 여느 아마대회 못지 않은 열기를 뿜었다.

3⋅4위전에서는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09학번, 10학번 선수들로 팀을 구성한 0910(김유환⋅김성식⋅조범근) 팀이 바꿈 멤버들이 출전한 타개링(한상현⋅이상민⋅김도훈)을 누르고 3위에 올랐다.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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