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에도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영화평론가

성하훈 2023. 12. 1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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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종원 평론가 회고록 <시 정신과 영화의 길>

[성하훈 기자]

 김종원 영화평론가 회고록 <시 정신과 영화의 길>
ⓒ 한상언영화연구소
 
"살아있는 평론계의 역사".

영화평론가 김종원을 부르는 말이다. 1960년 한국영화비평가협회가 만들어질 때 주역으로 사무간사의 책임을 맡았고,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인해 영화비평가협회가 강제해산된 이후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로 재건되는 과정에서는 총무간사를 역임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60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말 그대로 산증인이다.

영화비평을 시작했던 초기 인물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면서, 김종원이 존중받는 면도 있으나, 그보다 중요한 건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영원한 현역 평론가이자 영화역사 연구자를 자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시사회를 누비며 한국영화 역사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있는 김종원의 사전에 은퇴라는 말은 없다.

한상언영화연구소가 펴낸 김종원 평론가의 회고록 <시 정신과 영화의 길>은 그간의 삶을 돌이킨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기록이다. 한국영화역사에서 볼 때도 그가 관통했던 시기에 대한 기억은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그렇다고 김종원의 회고록은 단순히 한국 영화역사에 머물러 있지 않다. 1937년 제주 태생으로 1945년 해방과 이후 1948년 제주 4.3항쟁,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19 혁명,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등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을 관통했다. 따라서 그의 회고록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풍경을 세세하게 담아내면서 회고록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특히 학생 시인으로 일찍이 제주에서 문재로 주목받았던 김종원은 한국 문단의 대표적 문인들과 학생 시절부터 교류했는데, 이때 시인들의 활동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왜곡돼 전해지는 내용도 바로잡아 주고 있다.

예컨대 가곡 <떠나가는 배>가 한국전쟁 기간 제주로 피난 온 박목월 시인과 그를 따라온 젊은 여성의 사랑을 모티브로 했다는 말이 떠돌았으나 실상은 실향민들의 애환을 담은 곡으로 피난민들이 제주를 떠나면서 생긴 청춘남녀의 이별을 담았다는 것이다. 김종원 평론가의 직접적 경험 속에 묻어 나온 회고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4.3과 한국전쟁, 4.19에서 유신독재까지

어린 시절 발생한 제주 4.3 항쟁은 그의 집안을 어렵게 만들었다.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주 4.3 항쟁을 이야기할 때 촉발된 원인으로 1947년 3.1절 기념행사가 거론된다. 당시 몰려든 군중을 해산시키는 경찰의 말발굽에 짓밟힌 어린아이가 희생됐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종원은 회고록에서 "당시 아이는 생존했고 김수열 시인(현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의 형이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김종원의 부친은 좌익인사들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운동가로 제주민주주의민족전선위원장이었던 안세훈이었다. 1948년 4.3항쟁 소용돌이 속에 김달삼과 함께 해주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 제주지역 대의원으로 참가한 안세훈은 북한에 머물며 원산 인민위원회 위원장(원산시장)을 역임했다. 다만 김종원은 "같은 제주에 살면서 교분이 있었던 것뿐이고, 집안이 좌익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당시 혼란했던 제주에서 극우조직인 서북청년단이 부친을 잡기 위해 집을 찾아와 닦달하며 어린 김종원을 앞세웠는데, 어쩔 수 없이 부친의 거처로 안내하다가 재빨리 앞서 뛰어가서 부친에게 신호를 보내 숨게 만든 기억 등을 전하고 있다. 어수선한 시절, 부친이 자칫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설뻔했던 순간이었던 것. 가족의 희생은 없었지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김종원의 기억 속에서 그를 힘들게 한 시간이었다. 
 
 회고록 '시 정신과 영화의 길' 출판행사에 참석한 김종원 영화평론가
ⓒ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나 김종원의 바탕은 시인이다. 중학생 때부터 당시 학생 잡지 <학원>에 시가 채택된 이후 제주 학생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고, 한국전쟁 당시 제주로 피난 온 문인들과 만 시간을 가졌다. 이때 <백치 아다다> 작가인 계용묵 선생을 통해 지도를 받기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문인들이 모인 다방에서 만났던 이호철 작가, 천상병 시인, 김환기 화백, 천경자 화백 등과 대학 은사였던 서정주 시인에 대한 기억 등은 1950년 한국 문단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특히 당시 문인들이 모였던 명동의 여러 다방에 대한 회상은 당시의 다방문화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기록이다. 청동다방, 갈채다방, 돌체음악감상실 등 1950년 후반의 다방문화를 손수 그린 지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4.19혁명 때 이승만 독재에 분노해 당시 고대생들의 데모에 합류했던 일이나, 유신정권 당시 '주간조선' 기자로 재직하면서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 맞서 7만 원 월급에서 5천 원을 격려광고 내는데 사용한 일화는 자유언론을 향한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김종원 평론가는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후 조선투위에서 활동하며 한겨레신문 창간과정을 통해 독재정권에 맞섰던 시절을 회고한다.    

현대사와 영화사 이면을 엿보게 하는 기록

한국영화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던 '영상시대'의 출발에 대한 기록도 새롭다. 하길종 감독을 중심으로 이장호, 김호선, 홍파 감독, 변인식 평론가 등이 활동했던 영상시대는 유신독재 시절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김종원 평론가에 따르면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온 하길종 감독은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다 1972년 연출한 <화분>으로 청룡상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수상하지 못했는데, 청룡상을 주관하던 조선일보와 경쟁관계였던 동아일보가 미국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하길종의 영화가 한국식 정서에 맞지 않는다묘 배제했다는 비판 기사를 실었고, 이에 대한 청룡상 심사위원의 반박과 하길종의 반론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때 하길종은 자주 어울리던 변인식 평론가와 함께 현대비평가그룹을 만들면서 회원으로 영화담당 기자들까지 가입할 수 있도록 해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영평을 주도했던 이영일 평론가가 현대영화비평가그룹을 배신자로 생각하면서 영화평론가협회와는 소원한 관계가 됐다. 영화담당 기자들의 부서 이동 등으로 활동이 위축되는데, 이후 현대영화비평가그룹의 연장선 유현목 감독이 회장으로 있던 소형영화동호회의 젊은 감독들과 함께 만든 것이 영상시대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2017년 김병재 영화평론가협회장이 불명예 퇴진하는 과정에 대한 소회도 밝히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블랙리스트 문제가 드러나던 시기였다. 이후 블랙리스트 범죄는 국가범죄로 규정됐는데, 박근혜 정권 당시 김병재 평론가가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받은 초안을 토대로 언론에 기고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됐고 뜻있는 평론가들이 퇴진을 요구해 물러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김종원 평론가는 회고록에서 "당시 정권과 밀착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사퇴요구가 있었다"며 "영화평론가협회 발기인이자 원로회원으로 단체가 와해되거나 쪼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읍소하는 과정에서 흥분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고, 일부 회원들에게 마음을 상처를 주고 또한 상처를 받았다"고 솔직한 심정을 밝히고 있다.

180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그의 책은 사건과 시기적 특성을 중심으로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80년이 넘는 시간을 담고 있다.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와 영화사의 이면을 엿보게하 는 중요한 기록으로 개인의 역사를 넘어 풍부한 사료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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