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1.25배속으로 보기 힘든 신선도 99 ‘띵작’ [OTT 내비게이션⑩]
뉴미디어의 출현은 올드미디어를 긴장시킨다. 마치, 금세라도 올드미디어가 뉴미디어에 패권을 내주고 사멸할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내내 책만 읽던 인류에 음성 지원 라디오가 출현했을 때도, 라디오에 의존하던 지구인에 시청각 영화에 이어 안방까지 찾아가는 TV가 등장했을 때도 그랬다.
21세기 현재, 책도 라디오도 영화도 TV도, 덧붙여 OTT(Over The Top, 인터넷TV)도 공존한다. 물론 영향력은 상이하다. 책의 대중적 인기가 상대적으로 덜하고 OTT가 대세다.
대세인 뉴미디어 OTT를 보다가 올드미디어 소비를 자극받은 적이 있는가. 실상 소설이 원작인 OTT 드라마나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것이 소설 탐독으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다. 되레 올드미디어의 상상력과 기발함을 먹고 자란 OTT 작품들에 흠뻑 빠지기 일쑤다.
믿고 보는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작이라서 그럴까. 미장센이 아니라 ‘웨장센’이라 불리며 믿고 보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보듯 자신만의 색채와 화면 구조를 바탕으로 웨스 앤더슨만의 미학적 영상을 낭패감 없이 보여주는 감독의 영화라서 그럴까. 소설 <그렘린>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등 영화 매체와 친숙한 작가 로알드 달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그럴까.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 그것도 러닝타임이 40분에 불과한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라는 중편영화를 보노라면 당장이라도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단지 영화의 원작이 된 로알드 달의 소설을 읽고 싶다는 차원을 넘어, 21세기 접어들어 자꾸만 멀어져 가는 글로 된 이야기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친다.
이유는 다층적인데, 가장 압도적인 건 영화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가 보여지는 형식이 ‘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만큼’ 기존의 영화 문법과 달라서다.
어떻게 다른고 하니, 우선 배우들이 내뱉는 대사가 소설의 문장 그대로다. 영화 시나리오의 특성에 맞게 대화체로 각색되지 않은 채, 소설 문장 그대로를 배우들이 읊는다. 이에 맞춰 연기 톤도 캐릭터에 깊숙이 동화되어 그 안으로 들어가 표현하기보다 이야기의 ‘전달자’ 혹은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한다. 인물들의 연기가 파도를 타며 뜨겁지 않다.
또한, 마치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처럼, 카메라 방향인 제4의 벽(보통은 인물의 좌우와 등 뒤의 3면만이 존재하고 관객이 앉은 방향은 무대에 없는 것처럼 설정되고 연기한다)을 등장인물들이 자꾸만 의식하고 응시하며 발화한다. 마치, 이 이야기는 가상으로 꾸며진 현실이 아니라는 듯이.
브레히트의 연극들이 말하는 바가 당시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상기시켰듯, 영화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가 꾸며진 허구가 아니라 ‘진짜’임을 강조하듯 모든 인물이 카메라가 있는 제4의 벽을 의식하며 얘기한다.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읽는 대사로도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강조하며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거듭한다.
믿기 어려운, 그러나 듣다 보면 믿어지고 믿고만 싶은, 영화의 기본 스토리는 이렇다. 한 작가(랄프 파인즈 분)가 있고 그는 패션 감각이 좋은 어느 부자(베네딕트 컴버배치 분)가 발견한 얇고 푸른 책에 관해 적고 있다. 그 얇은 책은 기억력이 비상한 의사(데브 파텔 분)에 의해 쓰였는데, 의사는 자신이 만난 바 있는 ‘눈이 없어도 보는 자’에게서 들은 눈이 아닌 다른 비법으로 앞을 보는 수련에 관해 상세히 소개한다.
눈을 겹겹이, 철저히 가려도 앞을 보는 수련사(벤 킹슬리 분)는 실존하는 초능력을 믿지 않고 얄팍한 마술로 보는 이들에 대한 절망 속에 의사에게 비법을 전한 후 세상을 뜬다.
의사가 적은 얇고 푸른 책을 본 패셔니스타 부자는 시간을 투자해 비법을 실천하고 수련한 뒤 ‘눈 없이도 앞을 보는 자’가 된다. 그리고 그 부자는 새로이 얻게 된 초능력으로, ‘어떤 일’을 수행해 간다. 그 어떤 일의 종류에 웨스 앤더슨 감독이 우리 사회에, 재력이나 권력, 어떤 힘을 가진 이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실 스토리가 중요한 건 아니다. 이러한 스토리, 혹은 이러한 스토리가 주는 교훈은 익숙하다. 새로움은 이 익숙하고도 지당한 말씀을 전하는 웨스 앤더스는 방법론에 있다.
앤더슨 감독은 단지 구어체 대사 대신 문어체 소설 문장을 그대로 읽는 것으로만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마치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 무대장치를 설치하고 배우에게 옷을 입히고 벗기고 배경을 바꾸는 그 과정 자체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그 안에는 연극 무대에서 장면과 장면 사이, 장과 장 사이, 막과 막 사이 암전 속에서 일어나는 무대와 배우에 관한 요소들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하고. 영화 CG와 시청각 기술이 정교화되기 전 동원되었던 아날로그 효과들이 부활하기도 한다. 마치 책부터 영화까지 모든 문화예술 플랫폼이 하나의 작품 안에 ‘공시적으로’ 현존하는 느낌이다.
이 기막힌 영상 장면들을 글로 전하려 하니 한없이 부족하다. 백문이 불여일견 봐야 한다. 넷플릭스에는 감독 웨스 앤더슨과 작가 로알드 달이 만난 영화가 세 편 더 있다. 하나씩 찾아내 보는 즐거움은 뻔한 영화들을 보고 또 봐야 했던 사막에서 생각지 못한 오아시스를 연거푸 만나는 ‘해갈’을 맛보게 할 것이다.
기사 제목에 대해 책임져야 하니 설명하자면, 요즘 OTT에서 만나는 드라마나 영화들은 1.25배속으로 봐야 정상 속도로 느껴지듯 배우들의 말도 장면의 흐름과 전환도 속도가 더디다. 제작비를 줄이려는 편법인지 모르겠으나 ‘멋져’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인데.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를 비롯해 이 신선미 넘치는 중·단편 영화들은 결코 1.25배속으로 시청할 수 없게 등장인물들이 속사포로 말하고 장면의 전환과 전개가 빠르다. 어떻게 소설 문장 그대로를 다 외워 저렇게 빠르게 말할 수 있을까, 배우 하기 쉽지 않구나, 혀가 내둘러질 정도인데. 그래선지 더욱 영화 보는 느낌보다 소설 읽는 맛이 나고, 내가 보는 게 영화인지 소설인지 헷갈려지는 재미가 퐁퐁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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