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아들아. 밥 먹어라" 80년 걸린 문자

김재근 2023. 12. 1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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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군 경복미술문화원, 문해(文解)학교 졸업작품전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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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기자]

"사랑한다, 아들아. 밥 먹어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 세 마디를 쓰는 데 80년이 걸렸다. 아들은 감격에 목메었고, 어머니는 맺힌 한에 서러웠다. 전화기 너머로 둘은 오래도록 울었다. 손영숙 님 사연이다.
 
▲ 문해학교 시화전 문해학교 학생들(엄니들)이 전시된 작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신기하며 좋다, 고 하신다.
ⓒ 김재근
글을 모르는 이유를 같은 반 한갑순 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로 옮겨 적는다.

"제목 : 학교 못간 이유

부모들이
여자다고 학교 못가게 하였다
아버지는 삼삼어라고
나가도 못하게 했다
놀도 못하개 했다
밥도 안주고 종일
새만 보라고 했다
동냥치가 오며 무서워서
논내가서 업저붓서요"

내 아이에게 이 시를 주었더니 이해를 못 했다. '삼삼어'는 길쌈이다. 길쌈만 안 해도 천국 같다는 살아생전 어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낮에는 땡볕에 등이 벗어지고 밤에는 베틀에 앉아 허리가 부러질 듯했다, 하셨으나 쉽게 공감하지 못했다.

'동냥치'의 표준어는 '동냥아치'로 거지라고도 하지만 조금은 어감이 다르다. 배고픈 시절 동네마다 동냥치 몇은 꼭 있었다. 어떤 동냥치는 문 앞에서 줄 때까지 버티기도 했다.

그 광경이 내 기억에도 무섭게 남아 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논까지 도망가서 엎드려 숨었을까. '나가도 놀도 못하개'는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일만 했다는 것이니, 그 어린 시절이 어떠했을지 눈에 선하다.

'새만 보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고역(苦役)이다. 조정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새 보는 일을 이렇게 말했다. "곡식 한 톨이 귀한 시절이었다. 수확 철이면 새 떼가 극성이었다. 새 쫓는 것은 아이들 몫이다. 해 뜨면 주먹밥 한 덩이 들고 들로 나가서 해 질 녘까지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돌을 던지고 소리소리 질러야 했다. 이런 일로 결석하는 것은 학교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 시화전 펼침막 문해학교 학생과 박현옥 시인의 시화전을 안내하는 펼침막. 도착할 때 눈이 내렸다.
ⓒ 김재근
 
<문해학교 엄니들의 시와 그림, 박현옥 시인과 만나다!>라는 다소 긴 이름의 행사에 초대받았다. 박 시인과는 천연염색 때문에 인연을 맺었다. 반년 전의 일이다. 그 사연이 '애기똥풀, 잡초로 보지 마세요 https://omn.kr/240jb'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때 문해(文解)학교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들에게 인생을 배우는 대가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연말쯤 어머니 졸업작품 전시회가 있으니 바람도 쐴 겸 해서 다녀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글을 모르는 사람 보면 어머니 생각나

12월 16일 아침, 경복미술문화원(전남 화순군 동면 복암길 4)가는 길에 눈이 내렸다. 적당히 차가운 공기가 상쾌했다. 페인트칠이 화사한 옛 초등학교 담벼락에 펼침막이 환했다. 졸업작품전은 금년 12월 1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라고 했다. 다행이다.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알맞게 도착했다.

안과 밖, 이곳저곳에 학생과 시인의 작품이 조화를 이루며 심심하지 않게 전시되어 있었다.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문해학교 학생은 동복면 한천리에서 9명, 동면 복암리에서 12명으로 모두 21명이라고 했다. 글을 지으신 분도, 필사만 하신 분도, 그림만 그리신 분도, 부끄러워 내놓지 못하고 마음만 걸어 놓은 분도 계시다고 했다.
 
▲ 박현옥 시인 졸업작품이 걸린 전시장, 경복미술문화원이 무상으로 내주었다. 가운데가 박 시인이다.
ⓒ 김재근
 
전시장은 가볍게 추웠다. 전기난로 하나로 교실 한 칸을 훈훈하게 덥히기는 턱없이 부족했을 터이다. 문화원에서 전시실을 무상으로 내주었고, 전시 비용은 모두 박 시인이 사비로 충당했다는데, 이것만 해도 과분하다 싶기도 했다.

박 시인은 편안한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방문하신 분들께 죄송하다고 했다. 춥지 않냐며 건네는 따끈한 차 한 잔에 몸도 마음도 후끈해졌다. 박 시인이 궁금했다. 예전 만났을 때도 미소로 거절했었다. 이번에도 한사코 숨기더니 따스한 차 한 잔 때문이었을까 이력을 들려주었다.

"이곳 경복초등학교 26회 졸업생이에요. 그땐 쟁쟁했답니다. 동네 바로 앞이 화순탄광이었거든요. 제가 시를 제법 썼나 봐요(웃음). 6학년 때 교장선생님이 저보고 시인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졸업과 함께 시인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지 않았거든요. 사는 게 바빴어요. 중학을 졸업하고 이리저리 치이다가 결혼을 하였고 50줄을 넘어섰습니다. 고향에 왔다가 우연히 저를 언니라고 부르는 동창을 만났답니다. 광주에 있는 모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한다고 하면서 제가 시인이 되었냐고 묻는 거예요.

그때 느꼈던 초라하고 암울했던 기분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충격에 한동안 크게 앓았습니다. 그리곤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내친김에 대학까지 마쳤습니다. 등단하였고, 첫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지요.

석탄시대가 저물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지요. 경복미술문화원으로 바뀌었습니다. 관장님 배려로 6학년 때의 교실에 둥지를 틀었어요. 너무 감사하지요. 교장선생님이 생각나 펑펑 울었답니다. 시를 쓰고 천염염색을 하고 문해학교를 열었습니다.

문해학교요? 그건 제 엄니 때문이에요. 어릴 적 절에 갔을 때였지요. 천수경을 소리내어 읽으시는데, 책이 거꾸로 놓여 있는 거예요. 귀동냥으로 들은 걸 외우고 계셨던 겁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을 보면 항상 울 엄니 생각이 떠올라요. 제 늦깎이 공부도 한몫하지 않았을까요."

그 자신도 배움의 목마름이 언제 멈출지 모르겠다고 한다. 며칠 전 사이버대학 상담심리학 마지막 기말고사를 보았다며 웃는다. 고른 치아가 눈부셨다.
 
▲ 한갑순 시인 한갑순 님과 그의 시 <학교 못간 이유>
ⓒ 김재근
함께 전시된 작품을 보며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제일 인상 깊었던 이야기다.
"문자메시지 보내는 걸 자주 해요. 이게 어려운 엄니들은 편지를 쓰게 해요. 그냥 소리나는 대로 써요. 제가 딸이나 아들한테 전화를 해서 주소를 받습니다. 그렇게 7통을 보냈어요. 편지를 받은 딸 아들과 통화하면서 울었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같이 울었다니깐요. 수업 도중에 간간이 전화가 와요. 엄니들이 나 회관에서 공부한다, 이러면 저쪽에서 얼른 끊어요."
 
▲ 문해학교 학생(엄니들) 가방 맨 표정이 해맑다.
ⓒ 김재근
동네 어르신들의 문화생활 공간 있었으면

전체를 둘러보고 나니 의무감이나 보람만으로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려움은 없느냐고 물었다.

"오래전부터 꿈꿨던 일을 하는 것이라 아주 좋아요. 어르신들 글을 보면 표현의 소중함을 알겠어요. 그래서 그분들 흔적 글자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해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쓰고 버린 노트도 다 갖다 놔요. 어른들 마음이 담겨 있거든요. 이걸 묶어서 책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정말 마음뿐이에요. 이번 전시회도 그래요. 거하고 알차게 하고 싶었는데 솔직히 너무 부담스러워요.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재료비만 해도 기백만 원을 훌쩍 넘어서네요. 협찬이라도 받을 걸 그랬어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원(웃음).

얼마 전에는 석탄 광업소가 문을 닫았어요. 사람이 하나둘 떠나가고 텅 비어버린 동네는 몇 안 되는 어르신들이 지키고 있지요. 이곳 문화원도 금년에 교육청과 계약이 끝나요. 조그만 바람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이 동네 어르신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어요. 침울한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활력이 되었으면 해요. 문해학교도 상급반을 개설할까 합니다. 처음엔 한글을 깨우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자꾸 욕심이 생겨요. 책을 읽고 토론도 하고,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글도 쓸 수 있는..."
 
▲ 작품 감상 부부로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감상 삼매경에 빠졌다.
ⓒ 김재근
밖으로 나왔다. 눈은 멎었다. 간간히 비치는 푸른 하늘이 싱그러웠다. 운동장 가 잣나무 가지로는 까치가 오르내렸다. 교사(校舍) 앞엔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이 옛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로 전시된 작품 앞에서 두 사람이 사뭇 진지했다. 눈 구경 삼아 마실 나온 부부일까. 방해될지 몰라 그분들이 떠날 때까지 걸음을 멈추었다.

두 분의 뒷모습을 보며, 부모님께 받은 것이 없다, 사회에서 얻은 것이 없다, 고 너무 투덜대고만 살지 않았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축복일진대, 모든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닌지, 시화전을 보며 사연을 들으며 겸손해졌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인자 차 탈 때 물어 보지 않아도 돼야. 테레비도 재밌어. 가요무대 가사가 보인당께. 세상이 환해졌어, 얼매나 좋은지 몰러어."

덧붙이는 글 | 이글은 '화순저널'에 실린다. 네이버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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