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전쟁이 건드린 '美뇌관'…명문대 총장들 벼랑 몰았다

이유정 2023. 12. 1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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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딘 게이 미국 하버드대 총장이 지난 5일(현지시간) 미 하원의 교육·노동위원회의 '캠퍼스 리더들에게 책임을 묻고 반유대주의에 맞서기'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하원에서 이달 초 개최된 ‘대학 내 반(反)유대주의 청문회’의 여파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하원 교육·노동위원회가 주도한 이 청문회에 출석한 하버드·펜실베이니아(유펜)·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 총장들은 ‘이스라엘 전쟁 이후 대학가에서 유대인 학살을 촉구하는 시위·발언을 징계할 수 있느냐’는 의원들의 질문에 “상황에 따라 다르다”, “맥락을 봐야 한다”고만 답했다.

총장들의 이런 답변 태도는 정치권 뿐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 비판을 받았다. 결국 리즈 매길 유펜 총장은 공개 사과 끝에 사임했다. 클로딘 게이 하버드대 총장 역시 학생·교수진이 사임 성명을 내고, 유대인 큰손 기부자들이 기부 철회를 압박하는 등 벼랑 끝에 몰렸다. 하버드 이사회의 유임 결정으로 그는 자리를 지키게 됐다.

그럼에도 미 하원은 13일 총장들의 청문회 발언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청문회의 저격수 역할을 했던 엘리스 스테파닉 의원(39·공화·뉴욕)은 “이 결의안은 윤리적 진실의 편에 서기 위한 초당적 노력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X(옛 트위터)에 올렸다.


아이비리그 흔든 美청문회…사과·사퇴 ‘진땀’


리즈 매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은 지난 5일 하원 청문회에서 소극적인 답변으로 뭇매를 맞다가 공개 사과했고, 나흘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로이터=연합뉴스
미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미 최고 명문대인 아이비리그 총장들이 회피성 발언으로 일관한 배경에 “미국 사회의 해묵고도 민감한 학내 표현의 자유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사태는 지난 10월 하마스의 기습 이후 미 대학가에 번진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 시위의 결정판이었다. 하버드대의 36개 학생 단체 연합은 “하마스 공격의 책임은 이스라엘 극우 정권에 있다”는 비판 성명을 냈고, 하버드와 유펜·컬럼비아 등에선 잇따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지 맞불 시위가 이어졌다. 친팔레스타인 성향 시위대와 유대인 학생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일련의 사건을 놓고 공화당과 대학의 유대계 큰 손 기부자들은 “반유대주의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대학 총장들을 몰아쳤다. 빈면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반유대주의로 몰아 금지하면 학내 언론 자유가 위축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와 관련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설을 통해 “미국 헌법에 따라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 있지 않은 한 학생들은 보수든 진보든 캠퍼스 내 발언만으로 처벌 받을 수 없다”면서 “미국 최고 엘리트 교육기관 수장들이 이런 기준조차 명확히 제시하지 못 한 것은 유감”이라고 짚었다. 총장들이 비판 여론을 의식해 소신을 제대로 밝히지 못 한 게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학생의 권리, 정문 앞에서 사라지지 않아”


하버드대 전경.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사회에서 수정헌법 1조의 해석과 관련된 학내 표현의 자유 논란은 1960~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인 이슈다. 비영리 조직 미국시민자유연맹에 따르면 1696년 미 대법원의 ‘팅커 대 디모인 교육구 사건’ 판결이 분기점이 됐다. 당시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가 사회를 휩쓸며 학교들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65년 디모인의 한 공립고교 다녔던 학생 존 F. 팅커(당시 15세)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다는 취지로 검은색 완장을 차고 학교에 갔다가 정학 처분을 받았다. 4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미 대법원은 “완장을 착용하는 것도 하나의 의견 표명으로 볼 수 있으며, 수정헌법 1조가 명시한 학생들의 표현할 권리는 학교 정문 앞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고 판시했다.

이듬해 켄트주립대의 반전 시위에서 주 방위군의 발포로 대학생이 사망한 사건은 전국 800만 대학생, 고교생의 연쇄 시위를 불러오는 도화선이 됐다. 이후 학내에서 학생들의 정치적 의견을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법원, 표현의 자유 건건이 판단…줄소송 이어져


지난달 미 컬럼비아대의 팔레스타인 지지 및 표현의 자유 시위에 참석한 학생들. AFP=연합뉴스
미법원 홈페이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수정헌법 1조를 적용할 때도 한계가 있다. 어떤 표현이 ‘임박한 위험’을 내포하거나,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을 구체적으로 겨냥하고 있느냐(특정성)에 따라 표현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지난 10월 코넬대에서 “학교 안 코셔(유대인들의 음식) 식당에 총을 쏘겠다”고 온라인에 글을 쓴 3학년생이 체포된 건 그래서다.

반면 이런 경우를 제외하곤 발언의 자유는 대부분 인정한다는 의미도 된다. 두루뭉술하게 “유대인이 싫다”는 말은 허용될 여지가 크다는 건데, 이 경우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혐오를 방조하게 되는 딜레마가 생기게 된다.

이런 맹점을 보완하는 게 1964년 민권법이다. 사립학교라도 연방 재정을 지원받는 교육 기관은 인종, 피부색,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 금지 위반 여부에 관해 정부의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미 교육부는 지난달 하버드와 유펜을 비롯한 코넬·컬럼비아대 등 6개 대학에서 제기된 유대인 차별 5건, 무슬림 차별 2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미 대법원은 학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준을 다양한 판례를 통해 미세 조정해왔다. “음란물을 공립학교 신문에 싣는 건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등이다. 이런 상황이라 학생·교수는 물론 시민단체들까지 학교를 상대로 종종 소송을 제기한다. 대학 총장들의 ‘답정너’ 소극 대응도 이 같은 소송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캠퍼스 문화 전쟁도 배경


미 코넬대 캠퍼스에서 한 학생이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수정헌법 1조는 정부에 대한 시민의 자유 보호에 관한 내용이라, 사립대들이 꼭 준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송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아이비리그들은 미 대법원의 판단에 부합하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정책을 대부분 두고 있다. 최근의 논점은 ‘소수 인종이나 성 소수자 등 특정 집단의 안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혐오 발언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을 가치가 있느냐’에 맞춰져 있다.

이·팔 사태뿐 아니라 대학들은 최근 몇 년 간 학내 정치적 발언의 허용 수위를 놓고 골머리를 앓아 왔다. 낙태, 성 소수자 이슈 등 첨예한 문제들에 대한 의견 표명이 차별이나 혐오를 조장할 수 있느냐를 놓고 캠퍼스에서도 ‘문화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2021년 버지니아 공대의 보수 성향 학생 3명은 “학교가 ‘편견 대응팀’을 만들어 학내 자유로운 의견을 억압했고,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된다”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이 대학 편견대응팀이 한 동아리 회원 학생들의 발언이 “동성애 혐오, 인종차별, 여성혐오에 해당된다”고 지적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1심은 “편견대응팀의 지적은 학교의 징계라고 볼 수는 없는 만큼 표현의 자유 침해까지는 아니다”며 학교 손을 들어줬다. 학생들의 항소로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올라가 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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