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아는 형님’ 인사 유감
윤석열 대통령은 “내 방식이 맞다”는 확신이 강하다. 검사 시절 살아 있는 권력과 맞섰고, 검찰을 떠난 뒤 딱 1년 만에 대통령이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강서구청장 선거와 부산엑스포 유치 참패로 거침없는 불패의 신화(神話)는 깨졌다. 모든 관계자가 예견한 결과를 대통령만 몰랐다. 불통의 벌거숭이 임금님이 됐다.
이쯤 되면 바뀔 법도 하지만 특유의 국정운영 스타일은 여전하다. 검찰 선배 김홍일 국민권익위원장을 방송통신위원장에 지명했다. 전문성보다 학연과 근무연을 중시하는 ‘아는 형님’ 인사가 되풀이된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하는 헌법 1조의 민주공화국 정신과 충돌한다. 인재풀이 좁아져 국가 경쟁력이 약화돼 국민이 피해를 입으면 누가 보상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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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대통령 사심 없고 정책 바로 서
스스로 미숙·결핍을 인정한 뒤
혹독한 감시도 자청해서 받고
과거·친소 불문 인재 써야 성공해
」
김건희 여사 리스크도 문제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동향(同鄕) 목사로부터 명품백을 선물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다섯 번 선물을 제의했는데 명품을 주겠다고 했던 두 번만 면담이 성사됐다고 했다. 목사는 김 여사가 인사청탁을 받는 전화통화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여권이 정권을 되찾는 데 성공하고도 불과 1년 반 만에 세 번째 비대위를 꾸릴 정도로 혼란을 겪는 것은 윤 대통령의 경험 부족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대선에 출마하기 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뭔가 허술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해 주저하는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 성찰의 힘으로 자세를 낮춰 경청하고, 혹독한 감시를 자청했다면 지금의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 개국 8년 만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권신(權臣)과 친형제까지 죽인 무서운 인물이었다. 어느 날 왕의 휴식 공간인 편전(便殿)에 몰래 들어와 있던 사관(史官) 민인생을 발견하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맞다”고 했다. 그러나 민인생은 “신(臣)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신여불직(臣如不直) 상유황천(上有皇天)”라고 맞섰다. 태종은 그를 처단하지 않고 존중했다. 이런 관용의 힘으로 조선 500년 동안 군주의 절대 권력은 끊임없이 감시받고 절제될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이 배우자를 감시할 수 있는 특별감찰관과 공식적으로 보좌할 제2부속실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 시대의 하늘은 민심이다. 그런데 윤 정권은 민심과 불화하고 있다.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사건 특검법이 28일 민주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다고 한다. 이 와중에 명품백 사건이 터졌고 국민 70%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고 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대통령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민심과 싸우는 형국이 된다. 방치하면 내년 총선은 ‘김건희 총선’이 될 것이다.
이런 지경인데도 여권 전체가 그저 윤심(尹心)만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을 대통령이 결정하는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윤재옥 국민의힘 대표권한대행은 윤 대통령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90도 인사를 했다. 여권의 시곗바늘은 전제군주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 이 기이한 장면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수와 함께 죽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도 재판정에 선 예수를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다. 지금 아부꾼들은 대통령이 뿌려주는 권력이라는 마약을 한 방울이라도 더 핥기 위해 충성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의 황혼이 찾아오면 첫닭이 울기도 전에 싸늘하게 배신할 것이다. 염량세태(炎凉世態)는 박근혜 탄핵으로 이미 증명된 권력의 법칙이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에게 권력을 쥐여주면 된다. 더 가질수록 도파민이 많이 분비돼 뇌의 중독 중추가 활성화되고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경계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유령인 줄 알고 떨었는데 내가 유령으로 판명된 공포영화 ‘디 아더스’의 반전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아직 기회는 충분히 있다. 윤 대통령은 사심이 없고, 정책 방향이 대체로 바로 서 있다. 게다가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방탄당, 입법폭주당의 오명을 떨쳐내지 못하고 민생에서 멀어져 있다. 윤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미숙함과 결핍을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유·무죄로 판단하는 검사의 이분법적 가치관만으로는 품을 수 없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세계가 있다. 흑과 백이 아니라 경계가 모호한 회색지대에 더 많은 진실이 숨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엄중함을 알면 ‘아는 형님’ 카드를 남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반대하고 비판하더라도 내게 없는 지혜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하늘로 여겨야 한다. 그러면 모두가 협력자가 될 것이다. 뛰어난 인재는 과거 불문, 친소 불문하고 요직에 기용해야 한다. 성공한 정권,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이하경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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