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주의 시선] ‘식물 공수처’ 딜레마
존재감 없는 현실은 바뀔 수 있을까. 다음 달 20일 임기가 끝나는 김진욱 초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장 후임 논의가 한창이다. 무용론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일단 이 조직은 명맥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문제는 한 해 평균 150억원이 넘는 예산을 계속 쓰면서 성과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수사기관을 언제까지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는가다. 최근에도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에 대한 표적 감사 의혹 수사를 시작한 지 1년 4개월 만에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을 출석시켜 늑장 수사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7일에는 뇌물 수수 혐의를 받는 경찰 경무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출범 이래 구속영장 ‘5전 5패’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 지금까지 직접 재판에 넘긴 사건은 3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마저도 무죄 선고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지부진한 수사 사례와 수치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수장은 “공수처가 일을 잘해 고위공직자를 상대로 10건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기소했다고 생각해보라. 나라가 안 돌아간다”(10월 19일 국정감사)고 말한다. 제대로 일을 못 하는 게 오히려 애국하는 길이라는 궤변이다.
인력의 절대 부족, 검사 신분상의 불안정성, 고위공직자로 제한된 수사범위 등 김 처장이 주장하는 한계만으로 이 상황을 설명하진 못한다. 조직 구성 방식과 정치적 편향성 논란을 불러온 정체성이 핵심이다. 2021년 4월 임용된 1기 검사 13명 중 11명이 임기를 채우지 않고 떠났다. 최근 부장검사가 수뇌부의 정치적 편향성과 인사 전횡을 공개 비판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자 수뇌부는 부장검사를 감찰하고 검찰에 고발하는 분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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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간 기소 사건 3건이 전부
무능, 정치적 편향 비판받아
김진욱 처장 후임 인선 주목
」
이런 상황은 김 처장 등 수뇌부가 만든 측면이 크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 출금 수사를 무마하려 했다는 의혹 사건으로 수사를 받던 이성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을 김 처장이 관용차를 제공해 공수처 청사로 들어오게 한 일화가 대표적이다. 옵티머스 사건 부실수사 의혹, 판사사찰 문건 의혹과 같은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와 관련된 수사에 집중했는데 대부분 기소하지 않거나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인 수사를 했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무능하고, 존재감 없고, 편향된 조직이라는 평가 누적에 구성원들이 견디지 못한다.
탄생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개혁의 하나로 공수처 설치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 민주당은 공수처법을 2019년 4월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더니 그해 12월 정의당 등과 손잡고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정의당 등 군소정당의 요구대로 받아들여 현재의 공직선거법도 만들어졌다. 검찰의 힘을 빼놓겠다는 일념이 앞서다 보니 제대로 법이 만들어질 리 없었다. 공직자 범죄에 대한 기소ㆍ수사권을 모두 갖는 검찰 외 별도의 수사기관 설치는 사법 체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는 법률전문가들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됐다. 민주당 스스로 다시 되돌리려고 하는 문제 많은 선거제까지 수용하며 낳은 옥동자가 지금의 초라한 공수처다.
식물화된 공수처지만 정상적 기관으로 재탄생할 기회가 왔다. 공수처장 후보추천위원회가 지난달 8일부터 열리고 있다. 대상 8명 중 2명을 추천하면 윤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위원 7명 중 5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현재까지 그 조건에 맞추지 못하고 있어 이번 주에 4차 회의가 열린다. 정부ㆍ여당 측 추천위원들과 다른 위원들의 의견이 성향에 따라 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수(空手)처’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받는 공수처의 지난 모습을 상기한다면 어떤 후보자가 필요한지는 추천위원들이 잘 판단할 것이다.
물론 최종 결정은 윤 대통령에게 달렸다. 검찰총장 사임 후 자신이 한때 공수처의 수사 대상이 되기도 했던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 “계속 이렇게 정치화된 데서 벗어나지 못하면 공수처 제도에 대한 국민의 근본적인 회의를 바탕으로 폐지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공수처를 태어나게 한 민주당이 다수당인 상황에서 폐지를 추진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래서 지금처럼 존재감 없는 식물 조직으로 둘 것이라는, 또는 아예 자신과 뜻이 맞는 조직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예상이 돈다. 둘 다 틀리고, 공수처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선택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길 기대한다. 고위공직자ㆍ측근 비리를 감시하고 막을 특검이나 다른 기구를 설치하라는 요구를 조금이나마 잠재울 길일 수도 있다.
문병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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