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집권과 파벌 정치가 낳은 日 자민당의 '검은 돈 연금술' [이영희의 나우 인 재팬]
일본 집권 자민당 각 파벌의 정치자금 모금 행사인 '파티'는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번, 도쿄(東京)에 있는 대형 호텔에서 열린다.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석해 파벌 회장 등의 연설을 듣고 초밥과 샌드위치 등을 먹으며 친교를 나눈다. 파티 참석권(파티권)은 1장 당 2만엔(약 18만원). 의원들이 당선 횟수 등에 따라 일정량을 할당받아 판매한다.
누구나 파티권을 살 수 있지만, 기업들이 10장 단위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정치자금규정법에서 20만엔(약 180만원)을 초과하는 파티권 구매자의 이름과 액수를 파벌의 정치자금 장부에 적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부에 이름이 남지 않도록 10장 단위 묶음으로 사는 것이 관례다.
정치자금 받고 기록 안 남겨
요즘 일본 정계를 뒤흔들고 있는 자민당 '아베파'의 비자금 스캔들은 이 파티권 판매 과정에서 파벌과 의원들이 조직적으로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다. 각 의원들이 할당량을 초과해 파티권을 팔았을 경우, 파벌 측은 할당량 만큼의 금액만 파벌 장부에 수입으로 기재하고 초과 금액은 의원들 개인에게 현금으로 돌려줬다. 이 내역은 파벌 장부는 물론이고 의원 사무실의 회계 장부에도 적히지 않았다. 이렇게 파벌 의원들이 '꿀꺽한' 돈이 2018~2022년 5년 간 총 5억엔(약 45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개개인의 금융 기록도 투명하게 공개되는 요즘 시대에 어떻게 이런 범죄가 가능했을까. 일본에서는 1955년 자민당 창당 이후부터 이어져 온 당 내 파벌 정치의 구태가 그대로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행태는 파벌 지도부가 '검은 루트'를 통해 돈을 모아 이를 소속 의원들에게 배분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파벌 해체와 같은 대대적인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레이와(令和) 시대의 '리크루트 사건'
파벌은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직을 맡는 의원내각제를 가진 나라들에는 대부분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자민당 장기 집권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기인해 파벌 문화가 유독 발달했다.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당해 탄생한 자민당은 이후 1993년 비자민 연립정권에 1년 간, 2009년 민주당에 3년 3개월 간 정권을 내준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집권당의 자리를 지켰다.
정권이 교체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민당 내 파벌은 '당 내 당'의 역할을 했다.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 성장에 집중하는 길을 택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보수 본류'와 자주 국방을 주장하며 헌법 개정을 부르짖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보수 방류'간 대립이 대표적이다. 파벌들은 서로 다른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다른 정책을 내세우며 당 내 경쟁을 이어갔다. 물론 최대 목표는 자신의 파벌에서 총재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엔 늘 돈 문제가 뒤따랐다. 특히 하나의 선거구에서 복수의 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 당시에는 자민당 내에서 여러 명이 출마할 수 있어 이를 둘러싼 파벌 경쟁이 치열했다. 파벌의 수장들은 온갖 방식을 동원해 선거 자금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였다. 자민당 파벌 정치의 상징과도 같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전 총리는 "정치는 수(数)이고, 수는 힘, 힘은 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1970년대 대표적 정치자금 스캔들인 '록히드 사건'으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번 아베파의 비자금 스캔들은 '레이와(令和) 시대의 리크루트 사건'으로도 불린다. 리크루트 사건이란 1988년 자민당 실세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당시 신흥기업이던 리크루트사로부터 미공개 주식을 뇌물로 받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정치권 내 검은 돈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자민당은 정권을 잃었다. 1994년에는 선거 제도 개혁과 정치자금 제도 개혁을 기둥으로 하는 정치개혁 4법이 성립했다. 파벌의 과열 경쟁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중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 비례대표병립제로 바뀌었다.
"아베 파워가 만들어낸 스캔들"
2000년대 초반, 개혁을 내세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내각이 들어서면서 약화됐던 파벌 정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재집권과 함께 부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12년 총리직에 오른 아베 전 총리가 7년 8개월간 총리직을 이어가면서 아베파의 힘이 점차 강화됐고, 그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심각해졌다는 분석이다.
실제 파벌로부터 돈을 돌려받은 상당수의 의원들이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 돈은 장부에 적지 말라"는 파벌 측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외무심의관을 지낸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일본총합연구소 전략연구센터 이사장은 마이니치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번 사태를 "조직적인 불법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아베 전 총리가 계속 집권하는 한 뭐든지 해도 된다는 오만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야지마 야스히데(矢嶋康次)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내년 초 국회에서는 정치자금법 개정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기재 금액의 하한선을 크게 낮추거나 파벌 정치자금의 흐름을 전산화해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허위 기재 등의 문제가 드러날 경우 파벌 측과 소속 의원, 자민당 지도부가 함께 책임지는 방식을 도입해 재발을 막자는 주장도 나온다.
국민의 반응은 차갑다. 산케이신문이 지난 11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8.3%가 정치자금과 요직을 나누는 자민당 파벌 제도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정치학자 야마구치 지로(山口二郎) 호세이대 교수는 "국민들의 반감이 거세지면 점차 파벌에서 이탈하는 의원들이 늘면서 파벌 제도는 힘을 잃게 될 것"이라면서 "파벌 자체가 없어지진 않겠지만 자금을 모으는 파티는 사라지고 장기적으로 야당처럼 정책 논의 집단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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