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이 찬송, 불러 보셨나요
성탄절을 한 주 앞두고 있습니다. 거리엔 캐럴송이 울리고 대형 쇼핑몰엔 성탄 트리가 화려하게 장식돼 있습니다. 각 교회에서도 성탄을 앞두고 크리스마스 찬송을 많이 부르고 있습니다. 성탄 찬송 중엔 찬송가 126장 ‘천사 찬송 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도 있을 텐데요. 이 찬송은 누가 지었을까요. 바로 영국의 찰스 웨슬리입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의 동생이자 동역자, 공동 설립자입니다.
형제는 부모로부터 경건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고 청년 때에는 ‘홀리클럽’이라는 신앙 모임을 만들어 규칙적인 신앙 훈련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통해 참된 기독교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둘은 모두 영국 성공회 사제가 되었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사는 먼저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 얘기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묘하게도 이번 주 세계 교회사 속에는 찬송과 관련된 인물들이 적지 않습니다.
웨슬리 형제의 어린 시절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1709년 2월 9일 사제관에서 일어난 화재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화재에서 극적으로 구출됐는데 이때부터 어머니 수잔나는 존을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 때문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찰스 웨슬리는 1726년 옥스퍼드 크라이스처치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초기에는 경건 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형 존과 어머니 수잔나의 조언과 격려로 영적 생활을 새롭게 하려고 결심 후 매주일 성찬을 받으며 매일 규칙적 개인 기도와 경건생활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찰스는 두 명의 친구(윌리엄 몰간과 로버트 커크함)와 함께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매일 오후 3시간씩 성경 공부와 경건 서적을 읽고 대화했으며 정기적으로 감옥을 방문했습니다. 부친의 목회를 돕던 존 웨슬리도 옥스퍼드로 돌아와 이 모임에서 동생 찰스의 고전 연구를 지도하는 동시에 신앙 생활의 증진을 도왔습니다. 이것이 홀리클럽(Holy Club) 또는 질서 정연하고 체계적인 생활 방식 때문에 ‘메소디스트’(Methodist)라 불린 모임의 시작이었습니다.
1735년 찰스 웨슬리는 존 웨슬리와 함께 당시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였던 미국 조지아에서 선교하기로 했습니다.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존 버턴 사제를 만나면서입니다. 버턴은 조지아로 가서 선교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조지아 식민지를 개척한 제임스 오글소프를 소개시켜 줬습니다. 오글소프는 존 웨슬리에게 식민지인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선교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모친 수잔나도 “내게 스무 명의 아들이 있다면, 다 그렇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구나”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10월 14일 찰스 웨슬리는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았고 형 존 웨슬리와 함께 미국행 배인 시몬즈 호에 올랐습니다. 이때 같이 배에 탄 이들 중에는 독일 헤른후트 공동체에서 온 개신교 신자들인 모라비안 26명도 있었습니다. 항해는 4개월 23일 간 계속됐는데 위험한 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전복될 순간도 있었고 바닷물이 객실 창을 부수고 돛대까지 부러뜨릴 정도였습니다.
위기의 순간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모라비아 교도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했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이 모습은 웨슬리 형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배는 우여곡절 끝에 1736년 2월 6일 조지아에 상륙했고 존 웨슬리는 서배너에, 찰스 웨슬리는 프레데리카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신자들과의 목회 방식 차이 등으로 마찰을 겪다 찰스에 이어 존도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다가 모라비안교도들과 접촉했습니다. 피터 뵐러라는 모라비안교도는 자신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부족하기에 설교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존 웨슬리에게 조언자가 되어 믿음을 갖게 될 때까지 계속 설교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했습니다.
올더스게이트 집회에 갔던 웨슬리는 누군가 낭독하고 있던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면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했다고 느꼈습니다. 이후 구원을 확신하게 됐으며 다른 이들의 구원에 관심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존은 홀리클럽 회원이었던 조지 휫필드와 함께 설교사역을 함께 했는데 특히 브리스톨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새로운 교파를 시작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영국국교회 목사로서 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을 깨우며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는 그가 주도한 운동을 독립된 교회로 발전시키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조직은 필요했습니다. 브리스톨에서 웨슬리 추종자들은 ‘신도회’(society)를 조직해 처음엔 개인 집에서, 나중엔 자체 건물에서 모였습니다.
이후 이 조직이 크게 성장해 회원들을 효과적으로 돌보지 못하게 되자, 웨슬리는 11명 회원과 지도자 1명으로 구성된 ‘속회’(classes)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매주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앙 문제를 논하고 헌금을 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부유하거나 학식이 많지 않아도 지도자가 될 수 있었기에 당시 영국국교회에서 소외감을 느낀 이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또 여성 지도자가 이끄는 여자 속회가 있어서 감리교 내 여성 지위도 확립됐습니다.
웨슬리의 신앙 운동은 급성장해 영국 제도 전역을 여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브리스톨 감독이 그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웨슬리의 순회 전도가 교구의 질서를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웨슬리는 “세계가 나의 교구입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융통성 없는 교회 조직에 대한 저항으로 내뱉은 이 말은 후일 감리교 선교운동의 구호가 됐습니다.
존 웨슬리가 일으킨 이 운동에는 설교 임무에 동참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거기엔 동생 찰스 웨슬리도 합류했습니다.
찰스 웨슬리는 찬송가 작곡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찬송은 어린 시절 부모 교육과 홀리클럽, 미국에서의 선교, 그리고 형을 도왔던 순회 집회 등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신앙고백을 담았습니다. 대부분 성경 말씀에 근거해 찬송시를 지었고 애창 됐습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새찬송가에는 찰스 웨슬리가 작사한 찬송이 모두 13곡 수록돼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천사 찬송하기를’을 비롯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15장) ‘만유의 주 앞에’(22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장)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34장) ‘오랫동안 기다리던’(105장) ‘예수 부활했으니’(164장) ‘내 주님은 살아계셔’(170장) ‘대속하신 구주께서’(174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280장) ‘비바람이 칠 때와’(388장) ‘웬일인가 내 형제여’(522장) ‘나 맡은 본분은’(595장) 등입니다.
대부분 찬송이 익숙하고 유명하지만 그중엔 낯선 찬송도 있습니다. 174장의 경우는 한국교회에서 잘 불려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내용이 예수님의 재림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그만큼 우리 교회들이 재림 신앙을 강조하지 않거나 약화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성육신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을 생각하듯,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노예 제도는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노예화하는 법적 제도로, 독립 이전부터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날 때까지 미국에 존재했습니다. 1619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서 흑인 노예 20명이 거래된 이후 노예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습니다. 노예는 당시 담배 농사를 지어 생업을 이어가던 영국 이민자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1779년에는 무려 20만명의 흑인 노예가 팔려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담배가 과잉 생산되자 점차 면화 재배가 늘어났습니다.
면화 재배량이 급격히 증가해 수출이 이루어지면서 흑인 노예에 대한 수요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미국 남부의 노예 수는 1790년 약 70만명이었지만, 19세기 전반기에 남부 지역이 ‘면화왕국’으로 변하면서 흑인노예수가 급속히 증가, 1850년에는 32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탈과 인권 말살, 지독한 인종 차별이 발생했고 남부 지역에 노예제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초 대서양 노예 무역은 종식됐으나 미국 남부는 노예제가 핵심 경제 제도로 존속했습니다. 19세기 초반에 북부는 노예 해방 법령을 통과시켜 점진적으로 적용했습니다.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했고 남부는 농업이 발달했기에 미국은 독립 초기부터 무역 관세와 경제 등 많은 면에서 북부와 남부가 갈등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860년 11월 노예제를 반대하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에 반발한 남부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했고 다음 해 4월 남북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전쟁중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 1863년 1월 1일부로 남부 연합 내 노예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고 1865년 미국 수정 헌법 제13조에서 전국의 노예 제도를 금지했습니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1820년대에 필라델피아의 퀘이커교도인 벤저민 런디 등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시작했습니다. 폐지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1831년 보스턴에서 급진적 신문인 ‘해방자’를 발간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노예 제도를 독립 선언서와 기독교의 기본 정신에 어긋나는 악으로 보고 즉각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1843년 노예제 폐지 협회를 조직했습니다.
1840년 자유당(Liberty Party)이 출현하면서 노예제 폐지 문제는 도덕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자유당은 새로 연방에 편입되는 영토와 주에서의 노예제 폐지 및 노예 무역 금지를 요구했습니다. 전국적 폐지가 어려우면 우선 수도권인 컬럼비아 특별구에서만이라도 즉각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노예제 폐지 운동에는 흑인들도 가담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도망 노예 출신인 프레더릭 더글러스였습니다. 그는 매사추세츠 노예제 폐지 협회에 소속돼 있으면서 노예제 폐지를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에 대한 호소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여성 작가 해리엣 비처 스토 부인이었습니다. 그녀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기독교적 인도주의 입장에서 노예 가정의 파괴를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그 책의 대중적 호소력은 너무나 컸기에 북부의 노예 폐지론자들은 남부를 공격하는 가장 효율적인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제도가 성경에 위배되는 죄라는 점에서 정치적 타협이나 사회적 개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미국은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30년 동안의 설교와 주장이 없었다면 링컨이 직면해야 했던 노예제는 결코 이슈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세이어스는 1893년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교장의 외동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언어에 재능을 나타냈고, 1912년 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에 입학했습니다. 1915년 현대 언어를 연구해 최우등 성적으로 학위를 받았고, 1920년에는 예술 석사학위를 받아 옥스퍼드에서 최초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여성이 되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출판사 편집자로, 대형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을 했습니다.
15년에 걸쳐 집필한 14편의 추리 소설 ‘피터 윔지 경’ 시리즈와 여성의 삶을 바꾼 책으로 평가받는 ‘화려한 밤’(Gaudy Night)이 성공하면서 문학가로서 입지를 굳힙니다. 캔터베리 대성당의 청탁을 받아 쓴 희곡 ‘주의 전을 사모하다’가 1937년 초연돼 찬사를 받았고 ‘여자도 인간인가?’(Are Women Human?)를 통해 교회가 남성 성직자의 손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창조자의 정신’의 경우 20세기 교회를 움직인 가장 창조적이고 풍성한 삼위일체에 대한 고찰로 평가를 받습니다. 세이어스는 “신학과 문학은 동일한 경험을 기술하는 각각 다른 두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세이어스는 창조주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인간 창조자, 특히 예술가의 정신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그것은 창조적 아이디어(성부), 물질로 구체화되는 창조적 에너지(성자), 작품의 의미 혹은 작품에 대한 반응(성령)입니다.
저자는 이 3요소를 가지고 자유 의지와 기적, 악의 문제 등 다양한 신학적 주제를 넘나들며 신학과 문학의 차원을 한데 묶습니다. 책은 기독교 교리는 절대 따분한 것이 아니며,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쓰여야 한다는 저자의 신념이 탁월하게 표현된 작품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평생 성실한 작가와 성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삶을 진지하게 살아낸 도로시 세이어스는 ‘창조자의 정신’ ‘기독교 교리를 다시 생각한다’ 등 신학과 변증에 대한 깊은 통찰과 문학적 재능을 온전히 불태워 교회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515년 카타리나는 어린 나이에 수녀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고 이어진 18년간 찬양 기도 독경 침묵 수행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를 포함한 수녀들은 루터의 95개조 반박과 면죄부 판매에 대한 그의 비판,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논쟁 소식을 들었고 많은 수녀들이 루터에 열광했습니다.
당시 신부와 수도사, 수녀들은 결혼했습니다. 루터는 그의 ‘교회의 바벨론 유수’에서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므로 사제가 자기 아내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참되고 확고한 연합이라고 밝혔습니다. 부정한 정절을 끝내야 했고 루터의 충고는 실천에 옮겨졌습니다. 루터는 또 수도 서약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으며 사랑이나 자유와 모순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수도원을 떠나기 시작했고 루터는 손수 그들의 도피를 거들었고 짝을 찾아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혼했습니다. 믿음을 증거하는 뜻에서 결혼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카타리나를 ‘내 갈비’라고 부르는가 하면 ‘내 주인’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 카타리나의 애칭인 ‘케티’의 이름을 바꿔 ‘케테’(쇠고랑)로 부르면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합니다. 두 사람은 한푼도 없는 상태에서 결혼했습니다. 루터는 하늘 아버지께서 공급해주실 것으로 신뢰했습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이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원을 양도하고, 월급을 배로 올려주었고 사냥한 고기와 의복, 포도주를 자주 보냈다 합니다. 카타리나는 경제적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데 힘을 다했습니다. 케티는 루터의 씀씀이가 헤퍼 수시로 감시했고요. 마을 건너편 과수원 일을 맡았고 연못에서 물고기도 낚았습니다. 안뜰에서 닭 오리 돼지 소도 길렀습니다.
루터 뒷바라지가 힘들었던 것은 그가 자주 아팠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번갈아 가며 통풍 불면 감기 치질 변비 결석 현기증을 앓았고 귀울림으로도 고생을 했습니다. 약초 지식이 많고 찜질이나 마사지를 잘했던 카타리나는 남편을 보살폈습니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모두 6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또 친척 중 고아가 된 아이 4명을 길렀고 농민전쟁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거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집에는 25명이 살았습니다.
카타리나는 이들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녀 하인들이 있었고 그녀는 이들의 총감독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박사님’으로 불렀고 ‘당신’이라는 존칭을 썼다고 합니다. 루터는 케티에게 편지할 때 ‘사랑스럽고 진실한 당신에게’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루터는 결혼생활을 인격을 닦는 하나의 학교로 묘사했고 결혼은 교회가 덕을 훈련하는 장소와 하늘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로 취급해오던 수도원 제도를 대치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미국의 대표적 찬송가로, 작곡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스코틀랜드 혹은 아일랜드 민요에서 기원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전해집니다. 뉴턴은 원래 노예무역선 선장이었습니다. 1748년 자신의 배가 폭풍우로 좌초되려 하자 간절히 기도했다 합니다.
이후 기적적으로 폭풍우에서 벗어나면서 살았고 그후 성공회 사제로서 제2의 인생을 삽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로 시작하는 1절은 흑인 노예무역에 관여한 것을 회개하면서 자신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그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미국 흑인들의 영가가 됐다는 사실입니다. 이 찬송이 대단한 것은 이런 현실과 상관없이 무수히 많은 흑인 노예가 자신들의 비참한 일상 속에서 이 노랫말에 의지했고 희망이 사라질 때도 불렀다는 점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오랫동안 흑인 교회에서 그들의 복음성가로 애창됐고 ‘찬송가의 여왕’으로 불렸던 마할리아 잭슨,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 ‘여자 파바로티’로 불리던 제시 노먼 등이 부르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때 무디는 자신이 출석하는 주일학교에 많은 친구들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활의 어려움으로 무디는 초등학교를 끝으로 더 이상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1854년 보스톤에서 구두방을 경영하는 외삼촌에게 가서 점원으로 일했고, 이후 시카고로 옮겨 본격적으로 구두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일학교 교사로, 주일학교 교장으로 어린이 선교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일리노이 주에서 훌륭한 주일학교 운동가로 명성을 떨친 무디는 시카고에서 기독청년연합회에 적극 참여했고, 1861년 구두 판매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도시 선교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1867년 아내의 건강 문제로 영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곳에서 전도 활동을 벌였고 탁월성을 인정받아 1872년 다시 영국으로 가서 전도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듬해 무디는 이라 데이비드 생키를 대동하고 영국을 찾았는데, 이때부터 무디와 생키의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디의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메시지와 생키의 영혼을 울리는 듯한 찬송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1873년 이후 189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영국을 더 방문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1892년 성지순례를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하던 중 심장에 이상을 느꼈습니다. 이후 무디는 무리한 대중 집회보다는 예배를 통해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보살피며 조용하게 사역하다 1899년 11월 16일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중 쓰러져 얼마 후 별세했습니다.
무디는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으며, 성격이 퉁명스럽고 무뚝뚝하며, 스타일도 그리 세련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칼뱅주의 신조를 근간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예화를 적절하게 잘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인물 예화를 생동감 있게 잘 전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무디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청중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 하지 않았고, 건전하며 신령하게 전도한 위대한 부흥회 강사요, 최고의 설교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886년 무디가 선교와 선교사 훈련을 위해 세운 무디성서학원은 지금도 전액 무료로 운영되며, 전도자와 성경 교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 성결교회 선교사로 온 동양선교회 창시자 카우만과 킬보른은 이 학원 출신입니다.
<참고 자료>
‘현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은성
‘미국사’, 이주영 지음, 위키미디어 커먼즈
‘교회용어사전’, 가스펠서브, 생명의말씀사
‘마르틴 루터’, 홀런드 베인턴 지음·이종태 옮김, 생명의말씀사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그림자 영아 수사 이후 ‘베이비박스 영아’ 절반 급감 왜 - 더미션
- 반짝이는 교회의 밤 따뜻한 나눔 속으로 - 더미션
- 정부 정책 앞서… 정신건강 돌봄·상담 일찌감치 힘써온 교계 - 더미션
- 기독 청년 45% “심적 평안 위해 점·사주 본 적 있다” - 더미션
- 섬 교회는 발로 뛰고… 쑥쑥 크는 ‘안부 묻는 우유’… 대형 교회는 실탄 지원 - 더미션
- “노방전도 너무해” 맘카페가 뿔났다 - 더미션
- “축소사회 위기 속 교회·세상 잇는 다리 돼달라” - 더미션
-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남김 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 더미션
- ‘변치 않는 복음을 색다르게 전해보자’ 청년 목회자들의 ‘온라인 사도행전’ - 더미션
- 셀린 송 감독 “‘기생충’ 덕분에 한국적 영화 전세계에 받아들여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