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집단 무기력의 시대, 리더는 어디에…
“아빠는 삼성전자 주식도 안 사고 뭐 하셨어요?”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 퇴직한 50대 초반 지인이 아이들이 묻는 말이 달라졌다며 꺼낸 표현이다. 저랬던 질문이 “아빠는 서울 강남에 집도 안 사고 뭐 하셨어요?”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비트코인도 안 사고 뭐 하셨어요?”가 됐다고 한다. 부모가 저런 자산을 준비해두면 자녀가 성인이 돼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웅변하는 듯해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았다.
이런 말이 중년 세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사는 게 팍팍하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만 아니라 아이들 처지도 비슷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요즘 대입 수시모집 합격자가 발표되고 있다. 다음 달 정시 지원도 시작되겠지만, 대학 학과 선호도는 부모 세대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엔 이른바 ‘스카이(SKY)’로 불리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에 합격하면 입시에 성공했다고 했다. 하지만 성적 최상위권이 의대를 필두로 ‘메디컬 계열’로 향한 지 오래다.
대학 들어가도 미래 보장 없어
올 초 ‘2023 대한민국 집단 무기력의 시대가 시작되다’라는 강의로 유튜브를 달군 공부법 전문가 조남호는 “우리나라에선 행복과 돈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큰데, 더는 SKY를 나와도 크게 부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인생을 바꿔 주는’ 대입 선택지가 의대 진학이 됐지만, 진입 가능한 인원은 SKY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다.
대입을 준비하는 10대가 메디컬을 가는 방법은 수시와 정시가 있는데, 수시에서 지역인재 선발 등이 다소 느슨할 뿐 일반고 기준으로 내신이 1점대 극초반이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고교 3개 학년 모두 전교 1~2등 정도여야 한다는 말이다. 정시에서 의대에 가는 것은 수능을 매우 잘 봐야 가능한데, 이는 N수생의 무대다. 공부를 잘한다는 학생들도 학교 내신 시험 한번 삐끗하면 정년 없이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를 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이런 구조에서 학원을 도는 아이들이 무기력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집값에 저출산, 조기퇴직 물결
모두 의사가 될 필요도 없고 실제 대다수 성인은 다양한 직장에 다닌다. 하지만 자력으로 수도권에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게 쉽지 않다. 고물가에 영끌해 산 아파트 대출금 이자가 올라 자녀 학원비 대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40~50대 퇴직이 줄을 잇지만 노후 대비를 제대로 해 놓은 게 없다. 이런 미래가 뻔히 보이니 결혼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다. ‘워라벨’이 멋있게 들리지만, 일을 열심히 해봐야 변할 게 없다는 무력감이 우리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생이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지만 이런 여건이라 해법이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지방 광역시에도 기업의 생산 시설 등 일자리가 거의 없고 건물마다 각종 병·의원만 들어차 있다. 청년층 일자리도 없는데 조기 퇴직자가 국민연금 수급 때까지 크레바스를 버틸 일자리 찾기는 더 어렵다. 저성장 시대에 찾아온 집단 무기력 사회의 모습이다.
과거 우리는 벤처기업 붐을 거친 적이 있다. 초고속통신망 구축 세계 1위라는 말을 들을 무렵이다. 한때 스타트업이 고용을 주도했지만,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개발자 해고가 이어졌다. 학력 최상위층이 의대를 가지만 해외 의료 기업들이 고수익의 비만치료제 등을 내놓는 것 같은 파급 효과는 없는 사회, 뜻한 바 있어 인공지능 전공을 택해도 해외 선두 기업과의 큰 격차로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사회, 고급 인력을 배출해야 할 대학이 수십 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사회, 수도권에 모든 인프라가 집중된 사회를 어떻든 바꿔내야 한다.
내년 총선에도 기대는 어려워
개인이 목표와 활력을 되찾게 하려면 우리가 처한 문제를 제대로 짚고 대안을 말하며 지향을 제시해줄 리더들이 필요하다. 허허벌판에서 산업화의 초석을 세웠던 리더,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견인한 리더, 세계적 기업을 누르고 반도체 강국을 만든 리더, K소프트 파워를 일궈낸 창조적 리더 등 우리에겐 이런 이들이 있었다. 무기력을 떨쳐내게 하려면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대학 교육 및 입시 개혁, 국가 산업 구조 개편, 사회적 약자 보호와 국토균형발전 등 모든 국가 정책과 예산 배분을 결정하는 정치권에서부터 리더십이 세워져야 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다투지만 어느 쪽이 이기든 지금과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든 야당 대표든 다른 정치인이든 누구든, 현재 처한 상황에만 함몰되지 말고 대범한 청사진과 의지를 보여 달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발전한 나라'에서 '가장 빨리 사라질지 모르는 나라'로 바뀐 우리를 자극해줄 리더가 절실하다.
글=김성탁 논설위원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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