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의 힘은 색… 다른 작품의 3~4편 분량 작업”
“한복의 힘은 색에서 나온다. 색채의 언어를 장면마다 녹이면 감정이 증폭된다. 색을 섬세하게 쓰면 극에 현실감이 더해진다.”
지난 6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이진희 의상감독이 말했다. 그가 최근 작업을 끝낸 드라마 ‘연인’은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뿐만 아니라 의상으로도 화제가 됐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봄을 가득 담은 색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병자호란이 터지고 겨울바다같은 시퍼런 색으로 물들었다가, 먼 길을 돌아 만난 연인이 재회하면서 가을 낙엽처럼 농익은 붉은 색으로 막을 내렸다.
이 감독은 “지난해 2월부터 옷 디자인을 시작해 제작까지 2년 가까이 매달려 있었다. ‘연인’은 지금까지 중 단연코 가장 힘든 작품이었다”면서도 “밥 먹으러 식당에 가도, 지인 결혼식에 가도 사람들이 드라마 얘기를 하더라”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복식, 두 나라의 갑옷 등을 모두 만들어내고 사계절 옷에 생활감을 입히는 작업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이 감독은 “작업 하면서는 내가 내 무덤을 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인공 길채(안은진)의 성장과 여정을 옷에 담겠다고 처음부터 호언장담을 했다”며 “만들어야하는 옷의 양이 다른 작품 서너 편 정도와 비슷했다. 염색, 탈색, 워싱 등을 통해 민초들의 옷에 전쟁의 상흔과 시간성을 입히는 작업이 까다로웠다”고 돌이켰다.
그는 드라마, 영화 의상을 20년 넘게 만들어 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대미술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8년 대학로 연극 ‘갈매기’의 의상을 만든 게 시작이었다. 그는 드라마 ‘하얀거탑’(2007), ‘성균관 스캔들’(2010), ‘구르미 그린 달빛’(2016), ‘더 킹 영원의 군주’(2020) 등과 영화 ‘간신’(2015), ‘안시성’(2018), ‘일장춘몽’(2022),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등의 작품에서 인물들의 옷을 책임졌다.
작업실 곳곳에 그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 속 의상 3만여 벌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이 감독은 “옷은 가장 가까운 공간이다. 크고 넉넉한 옷을 입으면 편하고 꽉 끼는 옷을 입으면 긴장되듯, 배우들은 의상에 따라 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며 “작품 속 의상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배우가 가진 껍질의 일부다. 의상도 함께 호흡하고 연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극 의상을 오래 제작해 온 만큼 한복에 대한 대중의 인식 변화를 느낀다. 작품마다 옷을 제작할 때 주안점도 달라진다. ‘성균관 스캔들’이나 ‘구르미 그린 달빛’은 한복에 현대적인 느낌을 더하는 작업이었다면 ‘연인’에선 전통, 정통 한복에 가까이 가고자 했다.
이 감독은 “90년대 학번은 문화열등감이 강했던 세대다. 일본 애니메이션, 할리우드 영화, 홍콩 느와르를 좋아했고 우리 것은 내세울 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많았다”면서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만 한복에 관심 갖는다고 여겼다. ‘성균관 스캔들’을 맡았을 때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성균관 스캔들’ 의상은 한복에 디지털 프린팅도 하고 색채도 과감하게 쓰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구르미 그린 달빛’은 당시 팬톤 올해의 색이었던 로즈 쿼츠를 박보검 배우의 옷에 녹여냈다. 그는 “대중이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좋은 이미지를 많이 접하고, 이미지로 모든 걸 읽어낸다. 한복의 모습에 ‘지금’을 녹여야 전통과 현대가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또 어떻게 다를까. 그는 “K문화가 세상을 선도하는 시대다. MZ세대는 전통에 대한 선입견이 없고, 아름다우면 아름답다고 받아들인다”며 “지금쯤은 우리 전통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도 되겠다 싶었다. 그래도 길채의 볼끼 등 드라마 속 의상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자신에겐 한복의 아름다움을 동시대성으로 전달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요즘 세대는 ‘로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박찬욱 감독 영화 ‘일장춘몽’을 할 때 투자배급을 맡은 애플 관계자들이 작업실에 방문했다. 의상을 보여주니 한복이 이렇게 ‘힙’햐냐고 묻더라”며 “한복에 들어가는 패턴 디자인이 동시대적인 가치를 담을 수 있다고 봤다”고 전했다.
이 감독이 한복 의상만 만드는 건 아니다. 그는 “현대물의 경우 큰 틀에서 콘셉트나 방향은 잡지만 온전히 내 디자인이라기보다 기성품을 많이 쓴다. 스타일리스트와 협업하는 부분도 커 필모그래피에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현대물은 디자인을 하면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한다”며 “‘하얀거탑’은 이전까지 초록색이었던 드라마 속 의사들의 수술 가운에 파란색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남자 주인공의 심리와 잘 맞는 색으로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는데 이후 파란 가운도 많이 쓰이게 됐다”고 말했다.
한예종 무대미술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요즘 일주일에 이틀은 학생들을 가르친다. 콘텐츠가 증가하고 의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책임감도 무거워졌다.
이 감독은 “매력적인 직업이지만 그간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전문성이 소개되지 않았다. 특히 작품 속 한복은 과거엔 사람들이 크게 관심갖지 않았다”며 “사극을 하려면 시대별 복식 등을 꿰고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역사적 고증이나 무게감이 덜한 판타지 작품도 많아 한복의 외연을 충분히 더 확장할 수도 있다. 사극 의상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현대물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옷뿐만 아니라 무대미술 전반을 공부함으로써 가지는 강점도 있다. 이 감독은 “극 분석, 장면 분석, 자신만의 시각적 은유를 쓰는 방법, 연출가와 디자이너의 협업 등을 강의한다”며 “의상에 국한되지 않고 무대, 조명, 의상 등을 전반적으로 배우기 때문에 공간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 테면 세계관을 먼저 만든 뒤 특정 공간에 캐릭터가 놓여있다는 걸 생각한다. ‘연인’의 길채는 자연 속에 있는 이미지로 생명력을 보여주기 위해 컬러 팔레트를 ‘봄 색깔’로 정했다. ‘간신’ 때는 연산군의 욕망을 상징하는 빨간색으로 그 주변의 모든 것을 물들여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가 끝난 요즘은 강의와 함께 브랜드 하무의 내년 시즌을 준비한다. 하무의 옷들은 한복을 변형해서 디자인한 것이다. 얼마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옷들을 선보였다. 다음 달엔 드라마 ‘연인’ 의상과 하무 브랜드의 옷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그에게 옷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감독은 “옷은 삶을 담고 있다. 의상감독을 하다 보면 중세도 현대도 가고 동서양도 넘나들며 세계 여행하는 기분도 든다”며 “옷에 지형학과 인문학이 어우러져 극의 리얼리티와 줄다리기를 한다. 이번 생은 끝까지 옷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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