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차 싣고 국경 넘는데 아무도 검사를 안했다
2022년 9월 30일부터 2023년 4월 14일까지 9살 아들과 한국 자동차로 러시아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포르투갈 호카곶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약 4만 km를 자동차로 여행한(3대륙, 40개국, 100개 도시)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오영식 기자]
- 지난 기사 '전쟁 중인 러시아로 여행을? 일단 제 얘기 들어보세요'(링크)에서 이어집니다.
리투아니아에서 한국 김치를 만날 줄이야
러시아 국경에서 나온 우리 부자는 발트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로 향했다. 우리나라보다 큰 면적에 인구는 270만 명인 이곳은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나라이다. 수도 빌뉴스는 60만 명이 살고 있다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지방 중소도시보다 작게 느껴졌다. 대통령궁은 작은 지자체의 청사 건물보다 작았고, 시내도 아주 아담했다.
우리는 러시아 횡단을 기념하기 위해 케이크와 고기를 사러 재래시장으로 갔다. 아주 작은 실내 재래시장에서 돼지고기와 케이크를 사고 돌아보는데 한쪽 귀퉁이에 딱 봐도 한국인처럼 생긴 분이 김치를 팔고 계셨다. 김치가 맞는지 확인하러 다가가니, 정말로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팔고 있었다. 한동안 김치 구경을 못 한 아들을 위해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부자를 보며 많은 사람이 물었었다.
'왜 지금 굳이 러시아에 가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국가에 왜 여행을 가냐?'
하지만 우리 부자는 러시아를 여행하려고 한 게 아니다. 단지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세계를 여행하려면 러시아가 가장 가깝고 돈이 적게 들어, 러시아를 통해 여행할 계획을 세웠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러시아는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국경을 빠져나오는 데까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힘이 들었다.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기 위해 하루에 500km씩 거의 매일 이동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어른인 나도 그런데, 이제 아홉살밖에 안 된 아들은 어떨까. 그동안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힘든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힘든 곳을 지나 안전한 곳에 도착한 기념으로 아들과 조촐하게 파티했다.
"태풍아, 우리 그동안 1만km 넘게 운전했어. 태풍이도 그동안 힘들었지? 차도 오래 타고."
"응, 태풍이도 힘들 때 많았어."
"이젠 러시아에서 나왔으니까 그렇게 고생할 일은 없을 거야. 운전도 많이 안 할 거고."
"정말? 아빠 이제 나랑 많이 놀자. 알았지?"
"그래, 우리 케이크에 촛불 끄자. 삼겹살 많이 먹고, 오랜만에 김치도 많이 먹어."
"아빠, 외국 김치가 왜 이렇게 맛있어? 진짜 맛있어."
"그래? 정말이네. 러시아에서 산 김치보다 훨씬 맛있다. 우리 많이 먹자."
700년 된 건축물을 이긴 아이스크림
▲ 리투아니아 빌뉴스 대성당 600년이 넘은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
ⓒ 오영식 |
"태풍아, 우리 이제 리투아니아에서 방금 라트비아로 들어왔어. 저기 표지판 보이지?"
"응, 아빠 그런데 다른 나라에 오는데 왜 이렇게 금방 와? 러시아에서는 한 달이나 걸렸는데?"
"러시아는 엄청나게 큰 나라라서 오래 걸렸고, 다른 나라는 작으니까 금방 지나가지."
빌뉴스는 내륙 도시인 데 비해 리가는 발트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안 도시라 그런지 인구는 비슷했지만, 도심지도 훨씬 커 보였고, 지나다니는 차량도 훨씬 많아 활기차 보였다.
노면에 차를 주차하고 시내를 걸었다. 러시아에 비해 건물의 규모는 작았지만, 유럽 특유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아 '이제 진짜 유럽에 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성당뿐만 아니라 시청 건물도 아주 아름다웠다. 시간이 여유로워 계속 걷다 보니 아들의 투정이 시작됐다.
"아빠, 인제 그만 좀 가. 언제까지 걸을 거야?"
"저기 건물까지만 가고 좀 쉬자!"
"아까 본 거랑 똑같구먼. 뭐가 다른데? 그만 가!"
"저기만 가고 나서 쉬자~ 저게 700년 전에 지은 건물이래~"
러시아를 지나올 땐 적게는 6시간에서 많게는 11시간을 뒷좌석에 앉아 보내는 게 전부였지만, 러시아를 나오고 나니 차량 이동 거리는 줄고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태권도 학원도 가고 운동을 했었지만, 그간 러시아를 지나오며 운동이라고는 하루 10분 정도 걷는 게 전부였던 아들은 체력이 약해졌는지 30분밖에 걷지 않았는데도 투정을 부리며 입이 삐쭉 나왔다.
"태풍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아이스크림!"
"아이고~ 이 추운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응."
"그래. 저기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아들은 언제 다리가 아팠냐는 듯이 쏜살같이 뛰어갔다.
▲ 리가, 삼형제의 집 세개의 건물이 100년 차이로 지어졌다 |
ⓒ 오영식 |
일정이 여유로워진 우리 부자는 해안도로를 따라 에스토니아로 향했다. 에스토니아 국경을 지나 얼마 가지 않은 곳에 패르누(Parnu)라는 도시에 점심을 먹으러 들렀다. 선착장마다 요트가 가득한 한 해안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행 전 발트지역의 전통 요리 중 청어요리를 TV에서 본 적이 있어 청어요리를 한 번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들른 곳이었다.
일단 메뉴판에서 청어요리를 하나 시키고 아들이 먹을 만한 파스타를 주문했다.
잠시 뒤 익숙한 파스타와 함께 먹음직스러운 청어요리가 나왔다.
"태풍아, 뭐 먹을래? 이건 태풍이도 아는 스파게티 종류고, 이건 여기 전통음식이래."
"응, 난 이거."
잠시 두 메뉴를 보는 듯하더니 아들은 익숙한 파스타를 선택했다.
"그래. 아빤 이거 먹을게."
난생처음 청어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뜨겁게 데워진 철판 위에 청어살과 감자를 놓고 그 위에는 마요네즈와 양파를 덮고 찐 요리였다. 한 숟가락 먹고 나니 익숙하지 않은 비릿함에 후회가 밀려왔다. 청어요리를 아들에게도 맛보여 주려 한 점 아들에게 주었다. 아들은 먹는 듯하더니 일부러 그런 건지 바닥에 떨어뜨리며(!) 자기 파스타만 맛있게 먹었다.
평소 눈치가 빠른 아들은 아빠가 별로 맛있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안 그래도 느끼한 청어살에 마요네즈까지 듬뿍 들어간 전통 요리를 나 혼자 먹었다.
자유로운 국경을 보고 생긴 질투
▲ 발트 전통 청어요리 양념하지 않은 과메기를 마요네즈와 함께 찐 맛이 난다. |
ⓒ 오영식 |
▲ 탈린 파트쿨리 전망대 전망대에서 구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
ⓒ 오영식 |
북유럽으로 넘어가기 위해 숙소로 돌아와 탈린항에서 핀란드 헬싱키로 가는 여객선을 예매했다.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유럽에 대한 내 예상과 달리 티켓은 인터넷으로 간단히 예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출발시간에 맞춰 항구로 갔더니 아무도 표를 검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에선 목포에서 제주로 가는 배를 탈 때도 신분증 검사를 이중 삼중으로 하고, 또 차를 선적할 때는 차량 등록증을 꼭 확인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한데... 이 배는 심지어 에스토니아에서 핀란드로, 국경을 넘어 가는 여객선이다.
▲ 탈린항 페리 탑승장 인터넷 예매 후 이곳에 대기하다 탑승하면 된다. |
ⓒ 오영식 |
배는 아주 커서 식당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시설이 잘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탑승 절차가 아주 간단해서 이렇게 편리하면 굳이 항공기를 이용할 필요가 없겠다고 느꼈다. 한국에서 배를 이용할 때는 사람만 탑승하더라도 탑승 절차가 번거롭고 또 대기시간이 긴 편이라 '배편은 항공편을 이용할 수 없거나, 비용을 절약할 때 이용하는 교통편'이란 인식이 있었는데, 여기는 반대였다. 오히려 항공편보다 대기시간이 적게 걸리고 이용도 편리했다.
심지어 요금도 성인 1명, 어린이 1명, SUV 1대의 총비용이 12만 원 정도로 우리나라 배편보다도 훨씬 저렴했다. 순간 정말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우리나라도 통일만 된다면 훨씬 더 저렴하고 자유롭게, 자동차로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어딜 가나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자유롭게 국경을 이동할 수 있는 유럽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 탈린-헬싱키 여객선 아주 크고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다 |
ⓒ 오영식 |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여행 기간 내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작성하였으나, 사건 등 일부 내용은 기자의 저서<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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