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고백하자면 나는 즐거움을 위해 가끔 읽는 소설 말고는 책을 별로 안 읽는다. 그다지 재미를 못 느껴서 그렇다. 사실 이 책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한노보연)에서 기획한 '이훈구'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을 종류의 책이다. 그렇게 구술생애사라는 낯선 장르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재미있어서 거의 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 「사회 변혁을 꿈꾼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이훈구」 유경순 지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2023, 나름북스. |
ⓒ 나름북스 |
이훈구가 노동안전보건운동 활동가가 되기까지
이 책은 2003년 한노보연 창립 시 초대 소장으로 시작하여 202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노동안전보건운동에 헌신했던 활동가 이훈구의 생애를 그와 가족, 동지들의 구술로 기록하고 있다.
1960년생 이훈구가 겪었던 어린 시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당시 서울의 가난한 동네에서 한부모 가정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헤쳐나가는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출간 북토크에 이야기 손님으로 오신 이훈구의 누님께서 책 내용보다는 어린 시절이 유복한 환경이었다며, 그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어린 시절의 궁핍함을 과장하여 구술한 것 같다고 폭로(?)하시는 바람에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그의 가족 이야기를 보면서 1960-70년대의 청소년, 싱글맘, 가장 역할을 하는 장녀의 삶을 그려볼 수 있다.
이훈구가 아주대학교 79학번으로 입학한 뒤, 탈춤반에서 사회과학 학습을 통해 한국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인식이 생기며 운동에 몰입하게 되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격동의 1980년대 속에서 대학교의 탈춤, 기독교 동아리에서 평생을 운동할 활동가가 싹을 틔운 것을 보면 어느덧 운동의 다음 세대를 찾기 어려워진 지금의 대학교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불과 몇십 년 만에 한국 사회가 엄청나게 달라졌다는 것도 새삼 느낀다.
이훈구가 학교의 일을 정리하고 자신의 사상적 기반과 변혁적 노동운동에 대한 지향에 따라 당시 함께 하던 운동 그룹의 '이전팀'에 참여하고, 다양한 지역에서 직접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용접도 하고, 임금을 떼먹히기도 하고, 싸워서 받아내기도 하면서 노조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한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도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위험한 일이었는지 존경스러운 마음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당시 노동조건의 열악함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갈 길이 멀다. 아직도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현장은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만큼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의, 운동가들의 헌신이 있었던가 돌이켜 본다.
이훈구는 운동의 휴지기를 잠시 가졌다가 1999년 창립한 계급정치운동 지향의 '노동자의 힘' 결성에 참여하고 상근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전국적인 구조조정 저지 투쟁에 함께 하는 과정에서 '이상관 투쟁'에 함께 하게 된다. 대우국민차에서 일하다 산재를 입어 요양 중이던 이상관 노동자의 자살에 대해, 산재 인정을 비롯한 관련 법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이훈구는 이를 계기로 노동안전보건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한노보연의 창립 준비에 참여하며, 당시 본격화되던 근골격계 직업병 문제를, 산재 인정 투쟁에서 노동강도 강화 저지 투쟁으로 확장시켰다. 더 나아가 노동자의 현장 통제권을 높이고자 했던 투쟁 목표를 세우게 된다.
이훈구의 삶을 통해 앞으로의 운동을 생각한다
책을 보다 보면 한노보연 창립 시기 다른 노동안전보건단체와의 갈등도 볼 수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활동 방식이나 힘을 쏟는 영역은 약간 다를지라도 노동안전보건운동이라는 공감대를 함께 하며 동지적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단체들이다. 그러나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는 단체 사이에 운동 방향을 놓고 서로 날을 세우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이훈구 동지, 또는 당시 함께한 한노보연 동지들의 구술을 기반으로 작성한 책이다 보니 한노보연의 입장에 훨씬 무게가 실려서 서술된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노동안전보건운동에서 노동자가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전문가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운동의 과정과 성과는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 등의 쟁점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환기하게 된다.
한노보연 결성 초기, 조직이 좌충우돌하던 모습도 이제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지금이야 한노보연이 20년 동안 성장해 한국 노동안전보건운동의 대표주자로 자리를 잡았다고 나름대로 자부하지만, 초기에는 조직 내적인 위기도 있었다. 출범하자마자 소장과 사무처장이 꽤 긴 기간 자리를 비우기도 했고, 재정문제로 휘청이기도 했고, 상근활동가 3명이 조직에 문제를 제기하며 한꺼번에 그만두기도 했다.
다행히 이런 위기를 잘 넘기고 교훈으로 삼아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지금에 이를 수 있었지만, 여전히 초기 구성원들에게는 가슴 어느 한구석의 아픔과 후회로 남아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렇게 책으로 과거의 아픔이 드러나 혹시나 누군가에게는 묻어두었던 상처를 다시 떠올리게 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노보연뿐 아니라 사회운동단체라면 다들 여러 어려움을 겪어 봤을 터이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위기들은 언제라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면서 잘못은 고치고 역량은 키워 위기에 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책 후반부에서 인상적인 것은 이훈구 동지가 한노보연의 활동폭을 넓히고자 노력해온 모습들이다. 다른 운동과 더 섞이길 바라고 더 많은 이들과 함께하길 바랐던 그의 문제의식은 한노보연이 20주년을 맞아 선언한 '열린 조직'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뜻을 이어받아 다음 사람들이 계속해서 길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조건을 쟁취하고 노동자 스스로 작업장을 통제하여 진정한 노동의 주인으로 설 수 있는 그날까지'. (한노보연 창립선언문 중)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혜은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12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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