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강박에 의한 '부제소합의' 취소 가능"… 현대·기아차 1·2차 협력업체 분쟁

최석진 2023. 12. 1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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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아차에 자동차 차체 등 부품을 공급하는 1차 협력업체가 2차 협력업체와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약정한 '부제소합의'를 취소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차 협력업체가 부품 생산에 필요한 금형의 반환을 거부하면서 부품 공급을 고의로 지연하거나 중단해 생산에 차질을 빚는 상황에서 이뤄진 합의는 민법상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현대·기아차 1차 협력업체인 A사가 2차 협력업체 B사를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 상고심에서 1심 각하 판결을 유지한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1심 법원(수원지법 안산지원)으로 돌려보냈다.

A사는 현대·기아차와 직접 자동차 부품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차체나 프레임부품을 공급하는 1차 협력업체다. B사는 A사와 자동차 부품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A사로부터 부품 생산에 필요한 금형과 검사구 세트를 대여받아 생산한 부품을 A사에 공급하는 2차 협력업체였다.

그런데 2018년 9월 부품의 단가조정, 납품지연, 품질관리 등의 문제로 두 회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결국 A사는 2018년 11월 9일 B사에 계약 해지를 통보하며 금형 등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B사는 거액의 정산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금형 등의 반환을 거부했고, 부품 공급을 지연하거나 중단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2018년 12월 6일 A사는 B사를 상대로 금형 등의 반환을 구하는 가처분을 신청했고, B사 측은 '가처분신청을 취하하지 않으면 부품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뒤 실제 부품 공급을 중단했다.

일부 생산라인이 중단된 A사는 B사의 요구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금형 등과 관련해 가처분 등 법률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하고 가처분신청을 취하했다.

이후 B사는 2019년 1월 24일부터 A사에 정산금과 투자비용 및 손실보상금 등의 명목으로 22억~27억원의 지급을 요구하면서도 정산금 세부내역에 대한 자료는 제공하지 않았고, 같은 달 25일 다시 부품의 공급을 지연하기 시작했다.

결국 2019년 1월 31일 A사는 B사에 투자금과 손실비용 등으로 22억원(부가가치세 별도)을 지급하고 금형 등을 반환받기로 하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두 회사가 작성한 합의서에는 합의 이후 어떤 경우라도 A사가 합의 내용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며 B사나 B사의 임직원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이나 이의(각종 가처분, 반환청구 등)를 제기할 수 없다는 특약 조항이 포함됐고, 각서도 첨부됐다.

이 같은 특약을 위반했을 때는 합의금(부가세 포함 24억2000만원)의 2배를 B사에 배상한다는 내용과, 법원에 소장을 접수하거나 경찰이나 검찰에 고소·고발장을 접수할 경우, 또 소장이나 고발장 접수 후 취하해도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본다는 간주조항도 있었다.

나아가 합의에 관련된 내용이나 합의 과정을 제3자에게 제공하거나 누설하는 경우, 사소한 험담을 포함해 B사의 영업활동에 저해가 될 수 있는 언행이나 방해 행위를 하는 경우, 이 사건 금형 등을 별도로 제작하는 등 합의를 위반했을 때는 각 항목별로 50억원씩을 배상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2019년 6월 A사는 B사를 상대로 부당하게 받아 간 정산금과 그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1·2심 법원은 A사의 청구를 각하했다. B사와 맺은 합의가 적법하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소 제기 이후 B사에 대한 회생절차가 개시되면서 소송은 피고 B사의 지위는 소송수계인이 물려받았다.

재판에서 A사는 B사의 강박에 이해 이뤄진 합의였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원고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B사 관계자가 A사 관계자에게 불법으로 어떤 해악을 고지함으로써 공포를 느끼고 이 사건 합의를 했다거나 이 사건 합의 과정에서 법질서에 위배될 정도의 강박 수단이 사용됐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2심의 판단도 같았다. 특히 2심은 B사 관계자가 A사 관계자를 공갈해 24억2000만원의 합의금을 갈취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형사재판 1심에서 무죄판결을 선고받은 사실을 언급하며 1심판결은 정당하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B사 대표가 A사에 대해 부품 생산에 필요한 이 사건 금형 등을 반환하지 않은 채 부품 공급을 지연하거나 중단했고, 그로 인해 A사가 정산금 세부내역에 대해 검토하지 못한 채 이 사건 합의를 통해 요구받은 합의금을 지급하고 가처분이나 민·형사소송 등 정당한 권리행사를 포기하며 자신의 권리행사에 대해 막대한 손해배상액까지 지급하기로 약정한 것은 위법한 해악의 고지로 말미암은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이 사건 합의가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한 원심과 제1심의 판단에는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에 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판결을 파기하되, 이 사건은 대법원이 직접 재판하기에 충분하므로 자판하기로 하여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민사소송법 제425조, 제418조 본문에 따라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제1심법원에 환송한다"고 덧붙였다.

민사소송법 제418조는 소가 부적법하다는 이유로 각하한 1심 판결을 취소할 때 2심 법원은 사건을 1심 법원에 환송해야 하지만, 1심에서 본안판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심리가 된 경우나 당사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는 2심 법원이 스스로 본안판결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같은 법 제425조는 상고심 소송절차에 항소심 절차를 준용한다는 조항이다.

민법 제110조(사기,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 1항은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 상대방의 강박에 의해 이뤄진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한편 A사를 공갈한 혐의(특정경제범죄법상 공갈)로 기소된 B사 대표는 형사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후 2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실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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