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팔아먹은 임금의 형... 이완용보다 5배 더 받았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이재면 (자료사진) |
ⓒ 위키미디어 공용 |
지난달 23일 이용수 할머니와 고 곽예남·김복동 할머니 유족 등 16명이 승소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은 이달 9일 0시에 확정됐다. 일본이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은 결과다.
일본은 위안부나 강제징용 같은 식민 지배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이처럼 모른 척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만, 과거에 친일파들을 대할 때는 전혀 달랐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너트리자마자 친일파들에게 셈부터 치렀다. 그들이 섭섭하지 않도록 매우 신속히 사례금을 지급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탈하는 과정에서 친일파들의 협력을 받았다. 이로 인해 정치적 빚을 졌으니, 일본이 볼 때 친일파들은 빚쟁이였다.
그런데 빚쟁이들에게 줘야 할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은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고, 일왕이 은혜를 베푸는 마음으로 하사하는 국채증서라는 의미의 '은사공채'를 지급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11년 1월 12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은사공채 본(本)증권의 하부(下附)'라는 기사는 공작과 후작·백작·자작·남작을 '공족 및 귀족'으로 구분 지으며 이렇게 보도했다.
"조선공족 급(及) 귀족에게 대하야 거액의 은사공채 사령서를 하부함은 일반 지료(知了)하난 바어니와 금회에 해(該) 공채의 본증권이 완성되얏슴으로 명(明) 13일브터난 이강공(公), 이희공 양(兩) 전하에게, 오후 1시브터난 후백자남 등 각 귀족에게 일절 하부할 터인대."
은사공채를 하사한다는 소식이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명일인 13일 오전과 오후에 두 팀으로 나눠 지급된다는 기사다. 공족으로 분류된 이강과 이희는 전하로 불리는 데서 느낄 수 있듯이 대한제국 황족 출신들이다. 이들을 여타 귀족과 분리하고자 교부 시간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초명은 이평길이었다. 장귀인(귀인 장씨)이 그의 어머니다. 이희는 흥선대원군의 장남이다. 이재면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을 넘기는 데 협조한 대가, 83만 원
고종의 전임자인 철종이 사망한 날을 1863년 12월 8일로 잘못 적은 책들이 있지만, <철종실록>에 따르면 그날은 음력으로 철종 14년 12월 8일이고 양력으로 1864년 1월 16일이다. 그래서 고종이 왕이 된 해도 1863년이 아니라 1864년이다.
철종이 사망한 1864년에 이재면은 19세이고, 죽어서 고종으로 불릴 그의 동생 이재황(이명복)은 12세였다. 철종이 후계자 없이 사망한 이 상황에서 이재면은 동생에게 밀려 주상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만약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임금이었고 아버지를 뒤이어 왕이 되는 상황이었다면, 이재면이 왕이 됐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동생에게 밀려 세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이재면이 임금이 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7촌 관계인 철종을 뒤이어 왕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경우에는 다른 논리가 적용됐다. 직계가 아닌 방계가 군주로 등극하는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나이 어린 미성년자가 유리했다. 이때는 순수함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동했다. 이 점에서 이재면은 일곱 살 어린 동생에게 밀렸다.
그에 더해, 어린 아들을 왕으로 세워놓고 자신이 실권을 행사하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의 야심도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요절한 효명세자의 부인인 조대비(신정왕후) 역시 흥선대원군의 아들들 중에서 만만한 아이를 옹립함으로써 자신과 풍양 조씨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려 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런 배경들로 인해 왕위를 놓친 이재면이 대한제국 멸망(1910.8.29) 3개월 보름 뒤에 일왕이 하사하는 국채증서를 받았다. 이강과 더불어 그의 증서에 적힌 금액은 '톱'이었다. 백작 이완용이 15만 원을 받은 데 비해 그와 이강은 83만 원을 받았다. '대한제국 임원' 이완용이 더 많은 부역행위를 했지만, '총수 일가'인 이재면이 더 많은 사례금을 받았던 것이다.
대한제국 멸망 때 이재면은 일본을 적극 지원했다. 황실 가문이 국가와 동격으로 간주됐던 이 시절에 그는 자기 집안을 팔아넘기는 일에 앞장섰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재면 편은 "1910년 5월 일진회의 합방청원서를 찬성하고 한일합병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된 국민협성회의 합병실행 추진단체 한국평화협회가 6월 발기총회를 열 때 총재에 선임되었다"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1910년 8월 합병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 황족 대표로 참석해 가결시킴으로써 이완용(총리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조중응(농상공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민병석(궁내부대신), 윤덕영(시종원경), 이병무(시종무관장 겸 친위부장관) 등과 함께 '경술국적'으로 지탄받았다."
자신이 임금이 될 수도 있었던 나라다. 그런 나라를 팔아넘기는 최후의 순간에 황족 대표 자격으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뒤에 83만 원짜리 증서를 받았던 것이다.
이재면과 이강 외에 76명의 조선귀족이 은사공채 지급 대상자로 선정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에 따르면, 일본이 대상자들에게 지급한 은사공채 금액은 600만 원이 넘는다.
'5년 거치 50년 상환' 조건이었다. 일제 지배는 35년 뒤에 종결됐지만, 애초에 일본은 50년 뒤에 원금을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은사공채를 발행했다. 현금이 아닌 채권으로 지급됐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이자를 수령할 수 있었다. 6개월마다 지급되는 이자는 연 5%로 책정됐다.
2009년에 발행된 위 보고서는 이재면이 받은 83만 원의 현재 가치와 관련해 "166억 원에서 830억 원 정도로 환산"된다고 평가했다. 해마다 발생하는 이자가 8억 3천만 내지 41억 5천만 원 정도였던 것이다.
일본은 최하위 조선귀족인 남작들에게는 2만 5000원을 지급했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5억에서 25억 원으로 추산되니, 지금으로 치면 해마다 2500만 원에서 7500만 원의 이자가 발생했다.
▲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
ⓒ 이희훈 |
오늘날의 일본은 이용수 할머니 등에게 한 사람당 2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에도 고래 심줄처럼 오래도록 버티고 있다. 이와 달리, 100년 전 일본은 친일파들에게 매우 흔쾌히 거액을 약속했다. 한국을 빼앗을 때의 일본은 매우 기분 좋은 채무자였다.
이재면이 받은 83만 원짜리 증서는 나라를 넘기는 데 협조한 대가다. 이는 백성과 영토를 넘겨준 대가였다. '기업을 넘긴다'고 하려면, 공장과 기계뿐 아니라 직원까지도 넘겨야 한다. 공장과 기계만 넘기는 것은 기업을 넘기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이재면이 일본에 넘긴 것에는 대한제국 영토뿐 아니라 대한제국 백성들도 포함됐다.
백성들을 넘긴 대가로 83만 원짜리 국채증서와 더불어 이자 수령권을 획득했다. 이자를 지급하는 주체는 일왕과 일본 정부이지만, 실제로 돈을 뜯기는 쪽은 한국 백성들이었다. 즉, 이재면이 한국 백성들을 넘긴 대가로 83만 원을 약속받은 뒤 한국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돈으로 그 이자를 받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백성들에 대한 다중적인 수탈의 방식으로 재테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완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금액의 국채증서를 받은 이재면은 신분상의 특권도 함께 보장받았다. <친일인명사전>은 "한일합병조약과 함께 공포된 일본 천황의 조칙으로 의친왕 이강과 함께 공(公)에 봉해져 이희공 전하의 예우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 뒤 "같은 해 2월 일본 육군 중앙의 예우를 받으면서 제복을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라며 1911년 상황을 설명한다. 이듬해인 1912년 8월, 그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그런 뒤, 9월 9일 만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지위와 특권은 아들 이준용에게 세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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