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한국 영화에 빠져 한국인 아내와 한국에 사는 필수씨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자랐으나 현재는 한국에서 한국인 아내와 한국 영화에 빠져 사는 영화·드라마 프로듀서 피어스 콘란의 첫 산문집이다. 한국 이름은 김필수다. 제목에는 사랑하는 대상에 ‘필수’ 조건이 붙으면 필수란 사람이 곤란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그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계기로 한국영화의 매력에 빠졌다. 잔인함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안에서 한국의 트라우마와 의도를 발견하면서 애정하게 됐다는 것. 그는 한국영화 특징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꼽는다. 그는 ‘괴물’ ‘김씨표류기’ 등에서 ‘투신자살하는 회사원’의 이미지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향한 사랑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누군가 혹은 어떤 것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안다 해도, 새로운 것을 계속 발견하려고 노력하면 신비함과 열정은 식지 않는다. 최고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런 영화들은 아무리 뜯어보고 분해하고 이야기해도 새로운 해석, 새로운 이론, 새로운 느낌을 준다. 나는 대학교 졸업논문으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대해 썼는데, 15년이 지난 지금 느끼기로는, 그 후로 다시 볼 때마다 떠오른 새로운 아이디어만 갖고도 완전히 새로운 논문을 쓸 수도 있다(다시 본 것만 스무 번 정도 될 것이다). -23~24쪽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와 자유로운 생각 표현을 억압한 정부 덕분에, 한국의 영화감독들은 어떤 것에 대해 에둘러 말하는 방법을 오랜 시간에 걸쳐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요한 영화들은 서브텍스트를 이어 붙여 작품으로 만든 경우가 많다. -24쪽
한국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영화에 대한 내 ‘덕통사고’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비롯되었다(당시 나는 일본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였는데, 실수로 이 영화를 골랐다). 영화 속 잔인함에 충격이 심했지만 이미지들이 뇌리에 남았고, 몇 주 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았지만, 다시 보니 의도는 느껴졌다. 이렇게 마법처럼 한국 영화에 대한 열정이 시작되었다. -25쪽
한국 영화에 빠져드는 것은 기쁨이었다. 장르에 관계 없이, 이야기에 층이 정말 많았다. 나는 로맨스 영화를 보고 자라지 않았지만, 한국 로맨스는 좋아했다. 특히 연인이 시간, 장애나 병 등으로 인해 헤어지는 〈시월애〉 〈…ing (아이엔지)〉 〈내 머릿속의 지우개〉 같은 영화가 좋았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지만, 당시 나는 이 영화들이 돌이킬 수 없는 한반도 분단의 은유라고 상상했다. -27쪽
최면에 걸린 듯했고, 몸이 서늘했다. 영화를 보고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공포에는 정말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포는 마음속과 깜깜한 밤의 그림자일 수도, 과거와 미래의 유령일 수도 있다. 영화는 가장 깊은 곳의 공포를 비추고, 마주하고, 끌어안게도 해준다. -32쪽
나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더블린 개봉 날에 처음 보았고, 관객은 대부분 한국 교민이었다. 영화에서 합동 장례식 때 가족이 드러누워 뒤엉켜 우는 장면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웃었다. 며칠 후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또 보러 갔는데, 그때는 관객이 모두 아일랜드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그 장면에서 웃지 않았다. 내가 속한 문화의 우스꽝스러운 면을 보고 웃을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죽으면 우리는 검은 옷을 입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70~71쪽
서구 영화에도 술이 넘치지만, 한국 영화(와 드라마) 역시 좋은 의미에서 술판이다. 한국 미술감독들의 단골 메뉴(이자 홍상수 감독 영화의 기본 재료)는 당연히 초록색 소주병이다. 식당과 거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소주병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상록수’ 같은 상징물이다. -146~147쪽
정서경 작가가 작품에서 그리는 여성들의 연대에는 근본적이고 독특한 특성이 있는데, 특히 TV 드라마에서는 이것이 더 잘 드러난다. 정서경 작가는 여성들의 연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생생한 모티프와 상징에 담는다. 〈작은 아씨들〉 속 푸른 난초꽃도 그러한 상징이다. -174쪽
필수는 곤란해 | 피어스 콘란 지음 | 김민영 옮김 | 마음산책 | 208쪽 | 1만5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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