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모기떼 퇴치, 옛날 사람들이 강감찬을 '신격화'한 이유
[김종성 기자]
거란 대군으로부터 고려를 구해낸 강감찬은 한민족의 영토뿐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까지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임금인 현종은 '강군(姜君)'이 아니었으면 고려 문명이 위태해졌을 것이라고까지 높이 칭송했다.
몽골 침략기인 1254년에 최자(1188~1260)가 펴낸 <보한집>에 현종의 시가 나온다. 강감찬을 칭송하는 이 시에서 현종은 "당시 강군의 책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다 좌임인(左袵人)이 되었으리"라고 읊었다.
웃옷의 왼쪽이 오른쪽보다 밑으로 들어가면 좌임이고, 오른쪽이 왼쪽보다 밑으로 들어가면 우임이다. 동아시아 유목지대에서는 좌임이 통했고, 중국 같은 농경지대에는 우임이 통했다. 고대에는 한민족도 좌임을 했지만, 고려 현종 때는 그것이 이미 옛일이었다. 중국과 가까운 나라들은 좌임을 미개함의 징표로 이해했다. 그래서 좌임이냐 우임이냐는 문명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 중 하나였다.
강감찬이 아니었다면 고려인들도 좌임을 하게 됐을 것이라는 현종의 시는 강감찬이 고려 영토뿐 아니라 '고려 문명'까지 지킨 인물로 평가됐음을 의미한다. 현종은 그런 평가를 군(君)이라는 높은 호칭과 함께 시에 담았던 것이다.
▲ KBS2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 KBS2 |
과거의 한국인들은 그런 강감찬을 왜소한 체격과 연상시켜 기억했던 것 같다. 19세기말까지의 한국 역사학을 집대성한 단재 신채호의 글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을 그릴 때는 생김새가 호걸스러운 연개소문을 그려야 한다"고 한 직후에 "강감찬을 그릴 때는 몸집이 초라한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신채호는 역사학자가 역사만 공부하는 시대가 아닌,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함께 공부하는 문사철 시대를 살았다. 그는 자신의 역사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꿈하늘>이라는 자전적 소설에 담았다.
이 책에서 그는 "강감찬이 드시는데 키는 불과 오척이요 꼴도 매우 왜루하지만, 두 눈에는 정기가 어리고 머리 우에는 어사화가 펄펄 난다"고 묘사했다. 문과 장원급제자 출신인 강감찬의 이미지를 위 <조선상고사> 서술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 런던에서 출판돼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문학자 정인섭의 <한국의 설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곰보 자국이 있는 추한 얼굴"이라는 말로 강감찬의 외형을 묘사한 뒤, 그런 모습을 갖게 된 원인을 "(강감찬이) 천연두의 여신을 불러놓고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얼굴을 최대한 추하게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고 "(천연두 여신은) 그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기로 했다"는 말로 설명한다.
이처럼 강감찬의 외관 이미지는 KBS <고려거란전쟁>의 강감찬(최수종 분)과 다르다. 옛 한국인들은 그런 강감찬이 한민족을 이민족뿐 아니라 각종 해로운 것으로부터도 지켜준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강감찬을 신격화시켜, 그가 온갖 나쁜 것으로부터 한민족을 수호해주리라는 관념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한국의 설화>에는 강감찬이 경기도 양주 지역의 호랑이떼를 퇴치했다는 설화가 소개된다. 호환마마의 호환(虎患) 때문에 괴로워하는 양주 주민들을 위해 그가 삼각산 꼭대기에 올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설화 속의 강감찬은 그곳 노승을 불러놓고 "나의 고을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며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고 타이른다. 실제로는 호랑이 왕이었던 노승은 강감찬의 명령을 따랐다. "(그 뒤) 지금까지 호랑이를 서울 근교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고 위 책은 말한다.
<한국의 설화>는 강감찬이 경주 지방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없앴다는 이야기도 소개한다. 개구리 소음에 시달리는 경주 주민들을 위해 강감찬은 현지에서 제일 큰 개구리를 불러다놓고 "이 저자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는 그만 없어야 한다"고 '협조'를 구했다. 그러자 그날부터 경주 시내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호랑이왕에 이어 개구리왕도 조용히 타일러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도청(道淸)이라는 마을에서는 모기떼도 퇴치했다고 한다. 이때 구사된 방식은 다소 달랐다. 강감찬이 모기를 직접 타이르는 장면이 이상하다고 판단했는지, 이 설화의 창작자와 전파자들은 "종이에다 주문을 쓴 다음, 공중에 던졌다"는 스토리를 발전시켰다. 구두로 타이르는 방식이 아니라 주문을 써서 타이르는 방식이 사용됐던 것이다. 그날부터 도청 마을에서는 모기떼가 사라졌다고 <한국의 설화>는 말한다.
▲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 KBS |
이런 설화들은 귀주대첩의 명장인 강감찬에 대한 대중의 신앙을 반영한다. 강감찬 정도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관념이 호랑이떼·개구리떼·모기떼 등의 설화에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드라마나 영화에도 비과학적인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합리주의나 과학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런 작품을 즐긴다. 의학이나 자연과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귀신이 등장하는 납량특집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옛날 사람들도 지나치게 사실적인 스토리 전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비과학적인 요소가 담긴 설화를 즐겼다. 설화의 창작과 변형에 참여한 작가들이 강감찬을 소재로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만든 것은 그런 스토리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강감찬에 대한 대중의 신앙이 그 같은 창작의 저변에 깔렸다고 볼 수 있다.
강감찬을 소재로 하는 그런 스토리 전개를 경기도 이천 사람들도 즐겼다. 역사학자 이은식의 <지명이 품은 한국사 네 번째 이야기> 에 나오는 그곳 사람들은 강감찬이 맹꽁이떼를 퇴치했다는 설화를 창작하고 발전시켰다.
이 책은 "고려 초기,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이천의 대월면 군량리(郡梁里)에 있는 군들장터에 들려 시장 구경을 하고는 이곳의 자연 마을인 뒷말을 지나가고 있었다"라며 이곳 주민들이 맹꽁이떼 울음소리 때문에 불면에 시달린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런 뒤 강감찬이 민원 해결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감찬은 가장 큰 맹꽁이를 잡아오라고 주민들에게 부탁했다. '적군'의 대장을 불러다놓고 호통치는 강감찬의 모습이 여기서도 나타나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장면이다. 강감찬은 붙잡혀 온 '적장'에게 "너희가 아무리 짐승이기로서니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을 어찌하여 괴롭히는고"라며 "가엾지만 이곳에서는 더 이상 소요를 부리지 말도록 하거라"라고 타일렀다.
위 책은 "신기하게도 정말 이날 저녁부터 맹꽁이들은 벙어리가 되어 소리내어 울지 못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기뻐하며 노인을 둘러싸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라고 한다. 그런 다음, 주민들이 강감찬의 신원을 확인한 뒤 "강감찬 장군 만세를 외치며 잔치를 베풀고 그의 은혜를 칭송했다"고 말한다.
강감찬은 특이한 방식으로 거란 대군을 물리친 장군이다. 하천의 물을 막아놓은 뒤 일시에 터트리는 방법으로 적군을 혼란에 빠트리고 대승을 거뒀다.
이런 신묘한 승리는 사후에 그가 호랑이를 쫓아내고 모기떼를 퇴치하며 개구리와 맹꽁이 울음소리를 잠재우는 초능력자의 이미지를 갖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전술로 고려를 지킨 강감찬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를 위의 설화들로부터 절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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