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날 정도로 카타르시스"…누드 그리며 암도 극복한 5060
‘누드크로키 교실’ 현장 르포
앳된 얼굴의 20대 여성이 검정 원피스를 벗어젖히고 맨몸을 드러낸다. 웃고 떠들던 5060 사장님, 여사님들의 눈빛이 바뀐다. 먹이를 에워싼 맹수(?)처럼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손놀림이 바빠진다. 사지를 비튼 채 얼음이 된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때 쯤, 벨이 울린다. 다음 동작은 꽤 과감하다. 다리를 벌린 채 무릎을 꿇고, 머리와 몸을 활처럼 제친다. 새로운 먹이를 각자 도화지 안으로 잡아 와야 하는 맹수들의 자세도 달라진다.
도화지 안쪽 사정은 제각각이다. 전문적인 목탄 드로잉으로 제법 멋진 누드화를 뚝딱 그려내는 사람도 있고, 서툴게 연필을 잡고 떨리는 선을 긋는 사람도 있다. 스타일도 제멋대로다. 머리부터 그리는 사람, 다리부터 그리는 사람도 있고, 엉덩이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모델은 하나지만 그리는 이의 각도와 솜씨에 따라 죄 다른 그림이다.
지난 2일 칼바람이 매섭던 인천광역시 석모도 한복판, 아무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논과 밭 사이 외딴 갤러리에서 펼쳐진 풍경이다. 주말마다 부천의 작은 화실에 모여 누드크로키를 그리는 ‘가가쌤의 누드크로키 교실’ 회원들의 첫 전시 ‘선너머가네 전’ 오픈 행사였다. 20평 남짓한 작은 갤러리 벽면이 10여명 회원들이 욕심껏 내다건 작품들로 빼곡 찼다.
언론사에서 30여년간 인포그래픽 기자로 일한 ‘가가쌤’ 이정권 작가가 2017년 문을 연 화실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지긋한 연배의 ‘작가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잘 나가는 현역 웹툰작가도 있고, 디지털에 적응 못해 직업을 바꾼 전직 만화가도 있다. 미술협회에 등록된 화가도 있고, 평생 그림과 무관하게 살았던 공무원도 있다.
그림 실력 향상에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은 한결같다. 멋진 결과물을 추구하기보다 모여서 누드크로키를 하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동호인들이다. 이정권 작가는 “10여년 전 무심코 연필로 뭔가 끄적이다 흑연이 종이 표면에 그어질 때 손끝에 와닿는 미세한 감촉에 매료되어 지금까지 왔다”면서 “초를 다투며 살아 숨쉬는 인체를 표현하는 순간만큼은 질주쾌감과 무아지경에 빠져들 수 있는 게 크로키의 매력”이라고 소개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간 초집중 뒤 뒤풀이에서 잠시 어울리는 재미도 쏠쏠해 한번 발을 담근 회원들은 쉽게 발을 뺄 수 없다. ‘선너머가네 전’은 수년간 개근하다시피 화실을 지킨 회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성사됐다. 묵묵히 그림만 그리는 주인장은 전시에 통 관심이 없었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초대 회장’을 자처하는 원명옥 작가를 중심으로 전시회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석모도갤러리를 운영하는 전효진 회원이 흔쾌히 공간을 내줬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여주기 위한 전시는 아니다. 회원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전시다. 암 투병 과정에서 평생 해온 유화를 그만두고 누드크로키로 새 삶을 찾았다는 원명옥 작가는 “혼자 그리는 것도 좋지만 같이 몰입하고 호흡하는 소통의 시간이 너무 좋다. 사적인 고민과 조언도 나누면서 회원들끼리 서로의 삶에 시너지가 되고 있다. 크로키를 하면서 건강도 회복해 거의 개근중”이라며 “전라 상태의 모델과 교감하다 보니 살면서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더라. 내 세계에만 사로잡혀 살던 내가 남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게 되고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까지 느끼게 됐다. 아름다운 선을 그리다 보니 마음도 섬세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70세 최고령 회원인 오태숙 작가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된단다. 아픈 발을 끌고 크로키 수업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데, 이날 오프닝에는 와인·백주·안동소주 등 온갖 귀한 술을 싸들고 와서 회원들에게 베풀고 자신은 논알콜 맥주를 마시며 흐뭇해 했다. “나를 잊게 만드는 집중의 시간도 매력적이지만, 이런 자유로운 소통이 너무 즐겁다. 0명이 와도 크로키 교실을 계속 열겠다고 하는 가가쌤의 열정과 실력, 인품에 반해 일주일 내내 크로키 시간을 기다린다”는게 그의 말이다.
전시 오프닝 내내 모델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풍물공연을 하다가 코로나 이후 생업이 어려워 누드 모델을 병행하고 있다는 배자유(가명)씨는 “화실마다 분위기가 다른데 가가쌤과 회원분들은 배려의 차원이 다르다”면서 “모델을 도구처럼 대하는 곳도 많다. 바로 눈앞에 조명을 쏘거나 대놓고 몸을 평가하는 등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은데, 가가쌤 교실은 인간적인 소통을 통해 더 나은 포즈를 끌어내 주고 크로키에 대한 작가분들의 열정이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라 정이 간다”고 말했다.
미술을 전공하고 20여년간 누드크로키를 그렸다는 전문가도 있다. 성인웹툰 작가 원성덕씨는 인체 공부를 위해 오랜 세월 화실을 전전하다 이곳에 정착한 지 7년째다. “20대 때부터 크로키를 오래 했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한 적이 없었다. 나 혼자 주체가 돼서 그린다기보다 모델과 가까이서 대화한다는 느낌으로 하니까 공부가 많이 된다”고 말했다.
역시 초창기부터 화실을 지켜온 ‘개국공신’ 유민수씨도 눈빛이 남다르다. 그림에 대한 로망을 접지 못한 전직 만화가가 그다. “아날로그 세대라 트렌드를 못 따라가서 만화를 접었지만, 자부심이 있다”는데, 무슨 뜻일까. “생활체육이 있듯이 생활미술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림 좋아하는 사람끼리 그리면 그게 예술이죠. 메이저급 예술이 있다면 우린 풀뿌리 로컬로서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모델과 내가 같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 눈물이 나올 정도로 카타르시스가 오죠. 일주일치 행복을 여기서 누리고 있습니다.”
석모도의 낙조 무렵 시작된 행사는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회원들은 십시일반으로 회를 뜨고 수육을 삶아 잔칫상을 벌렸다. 모델은 국악 반주에 맞춰 한국무용을 응용해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누드 퍼포먼스를 펼쳤고, 명예회원들의 클래식 기타연주, 벨리댄스 같은 축하공연까지 이어졌다. 아마추어 벨리댄서의 몸매는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런 장면까지 놓치지 않고 도화지에 담아내는 ‘작가님’들은 과연 ‘라이프 드로잉’의 달인들이었다. 예술이 멀리 있지 않았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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