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때 묻은 필카 들고 벌교 여행, 온통 갈색빛이네요
이메일이 디지털 사진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 <기자말>
[안사을 기자]
어떤 카메라를 들고 가느냐에 따라 여행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카메라의 물리적 한계와도 관계가 있고 감성적 측면과도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휴대폰 카메라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디지털카메라는 촬상면이라고 할 수 있는 센서가 전자식으로 되어있어, 빛을 받아들이는 민감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래서 빛의 양이 충분하지 않은 실내 위주의 여행지에도 적합하다.
반면 필름 카메라는 감도(ISO)가 필름마다 정해져 있고 한 번 카메라에 넣으면 모두 소진하기 전에 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감도가 아무리 높은 필름을 넣는다고 해도 고작 ISO800밖에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입자가 너무 굵고 거칠어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서 필름 카메라를 지닐 때는 실내가 주가 되는 여행은 잘 짜지 않게 된다.
이렇게 물리적, 기계적 한계에 기인한 차이 외에도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성적 측면 또한 존재한다. 왠지 서글픈 향수에 젖게 될 것 같은 곳, 곱게 낡은 물건들이 있는 곳, 사그라져가는 계절이 눈에 띄게 어울릴 것 같은 곳 등을 갈 때면 꼭 필름 카메라를 챙기고 싶다. 필름의 종류에 따라 특성이 달라지니 예전에는 그것을 정하는 것도 재미였다. 값이 오르고 단종되어 그러한 다양성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필름에 기록하고 싶은 곳이 따로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찾아와서일까. 최근 들어 옛것을 만날 수 있는 거리를 찾아가고픈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옛것이란 몇백 년 전의 유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겪어 온 세월에 대한 향수라고나 할까. 아주 어릴 적 보았음직한 것들, 근대화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모습에 관한 것들이다.
테마식 조성으로 새롭게 관광화한 거리 또한 보는 재미가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정말로 남아있는 것들, 아직도 옛날 모습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들이다. 벌교는 그런 측면에서 볼 것이 참 많았다. 오래전 모습 그대로, 성실하게 기름칠만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버려져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아직 바꾸지 않아서 그대로인 삶의 터전이었다.
석양과 찰떡궁합, 벌교의 갈색 풍경
▲ 벌교천과 억새 바다를 만나기 직전 벌교천의 모습 |
ⓒ 안사을 |
▲ 갈색 빛의 향연 역광의 햇빛을 투과시킨 억새가 갈색 빛으로 빛나고 있다. |
ⓒ 안사을 |
저녁 무렵이 되자 온 동네에 갈색빛이 물들었다. 매우 청명했던 하늘은 어떠한 거름망 효과 없이 쨍한 석양을 직광으로 전달했고 갈대는 그 빛을 연하게 품었다. 풍성하게 피어난 갈대의 솜털은 일종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되어 도로며, 건물이며 할 것 없이 황금빛을 뿌려댔다. 천변을 한가로이 걷는 사람들의 얼굴 또한 금칠을 한 듯 빛났다.
보통 이 시간이 되면 잘 곳을 찾는 일이 남았다. 여행이 잦아서 경비를 아낄 목적도 있고, 자연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행복하여 주로 차박을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조건은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차 내부에 눕더라도 외부에 짐을 내려놓을 필요가 없게끔 간소한 꾸림으로 여행을 떠난다. 가까운 곳에 화장실이 있으면 더욱 좋다.
▲ 마을을 관통하는 경전선 도롯가에 차단기가 있는 단선의 철도. 참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다. |
ⓒ 안사을 |
▲ 건널목 저곳을 건너면 용두마을(순천시 별량면)이다. |
ⓒ 안사을 |
벌교읍과 별량면을 왔다리 갔다리 하다보면 철길 건널목을 몇 개 건넌다. 다리와 터널 등으로 선형화된 요즘 철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경전선인데 이 또한 복선화 공사를 거치면서 많이 달라졌지만 이곳의 철길은 여전히 단선이고 마을을 지난다.
결국 잠자리는 벌교읍 한복판이 되었다. 밤새 열려있는 화장실이 딸린 공영주차장이 여럿 있었다. 우리는 둘 다 하지 않지만, '야영 및 취사 금지' 팻말이 붙어있는 곳에서는 머무르지 않는 것을 나름 원칙으로 한다. 즉 차 안에서 잠만 잘 뿐, 단순 주차와 다름 없는 일명 '스텔스 차박'이지만, 해당 문구가 달려있다는 것은 누군가 주민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므로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눈을 뜨면 곧바로 절경이 펼쳐지는 잠자리는 아니었지만 벌교의 읍내는 과거와 현재가 따뜻하게 공존하는 느낌의 집합체였다. 평점 좋은 식당에서 꼬막 정식을 먹고 한참을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차에 쏙 들어가 잠들기에 충분히 낭만적인 거리였다.
꼬막과 닮은 따뜻한 회색 도시
이른 아침 눈을 떠 잠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한 세면 후 다시 동네 한 바퀴에 나섰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벌교 시장이었다. 일찍부터 운반 차량에서 꼬막을 내리는 상인들로 북적였다. 분명 장날이 아니었는데 수산물과 야채를 파는 할머니들이 가득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방앗간에서는 꼬순 내가 물씬 풍겼다.
"안녕하세요. 5일장이 여기가 맞나요?"
"여그서부터 쩌그까지가 다 시장이지 뭐."
"근데 오늘 장날이 아닌데도 나와 계시네요?"
"장날 아니라도 걍 나와서 팔지. 심심헝께."
사람을 꼬드기는 호객 행위가 없어서 시장을 구경하는 동안 참 마음이 편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무뚝뚝해 보이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주고받고,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활기와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시장 풍경은 참 오랜만이었다. 꼬막을 몇 킬로 더 사갈까 고민했다.
▲ 시장 갖가지 수산물이 가득했던 전통시장 |
ⓒ 안사을 |
▲ 시장 내 떡집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기계 앞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떡들이 유혹적이었다. |
ⓒ 안사을 |
아침 식사도 꼬막으로 먹었다. 시장에서 꼬막 1kg을 사면 8천 원 정도 한다. 한 그릇에 1만2천 원인 꼬막 비빔밥 두 그릇에 들어간 꼬막의 양을 보니 대충 그 정도 되어 보였다. 소매가 기준의 원가를 생각하면 관광지에서 충분히 낼 수 있는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아침 식사는 미리 준비한 간식이나 편의점 음식으로 간단히 해결하곤 하는데 이날은 식당에서 배불리 맛있게 먹었다.
▲ 문구점 태백산맥길에서 영업중인 작은 문구점 |
ⓒ 안사을 |
당시의 디자인이라고 하면 '일본풍'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걸으며, 단지 '예쁘다'라는 생각만 하지 않고 아픈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배경은 해방 이후를 그리고 있지만,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일제 강점기의 상황을 함께 생각할 수 있겠다.
▲ 보성여관 실제 숙박도 할 수 있는 곳 |
ⓒ 안사을 |
▲ 보성여관 2층의 다다미방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곳 |
ⓒ 안사을 |
그런데 벌교 읍내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관광지로 새롭게 단장 한 거리가 아니었다. 오래전 모습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원래의 기능 또한 활발히 수행하고 있는 곳들이었다. 아직 개축되지 않은 많은 식당들이 그랬고, 언제부터 살아왔을지 모를 낡은 집들이 그랬다.
▲ 이발소 네모 반듯한 건물처럼 머리도 단정하게 잘라줄 것 같은 곳 |
ⓒ 안사을 |
특히 제일 눈에 들어온 건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읍에 존재하는 것 치고는 매우 큰 규모인 것을 미루어 과거 번성했을 당시 벌교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얼마 전 다녀온 중앙아시아의 터미널 내부와 대단히 비슷한 모습 또한 재미있었다. 예식장과 함께 있는 터미널을 처음 보기도 했고,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예식장은 언제까지 운영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 벌교공용버스터미널 옛날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현재까지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터미널 모습 |
ⓒ 안사을 |
▲ 터미널 내부 남원시의 터미널도 비슷한 분위가 있다. |
ⓒ 안사을 |
그런데 사진을 보다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양옆으로 하얗게 노출이 망가진 부분이 있다. 아마도 500분의 1초보다 빠른 셔터스피드를 준 사진에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가로로 주행하는 두 개의 셔터막이 제대로 상호작용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인 것 같다. 보통은 더 어두워지는데, 마치 빛이 샌 것처럼 더 밝아지니 의문이긴 하다.
▲ 노란 풍경 아직 노란 빛을 선명하게 지니고 있던 남도의 은행잎 |
ⓒ 안사을 |
손때 묻은 오래된 카메라는 여기저기 닳아 애초의 까만 색에서 황동의 빛깔이 조금씩 드러났다. 두 개의 셔터막이 서로 죽이 맞지 않아서 필름에 빛 얼룩을 남겨버린 셔터 또한 오래된 도시와 참 잘 어울리는 듯했다. 조금만 추워지면 셔터박스 내부의 반사경이 올라 붙어 다시 내려오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묵묵히 상을 기록해내는 필름 카메라 모습은 마치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회색빛 펄과도 닮았다. 할머니가 진하게 쑨 묵 같기도 한 갯벌, 그리고 그 속에서 추운 바람을 맞으며 통통하게 살을 채워가는 생물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는 벌교의 읍내와도 닮았다.
덧붙이는 글 | 여행은 지난 11월 26일부터 27일까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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