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들
[오태규 기자]
▲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 부부 |
ⓒ 대통령실 |
윤석열 대통령이 3박 5일간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마치고 15일 귀국했습니다. 이 방문을 포함해 올해 13번째 해외 방문입니다. 국빈 방문으로 치면 올해만 일곱 번째입니다. 1월 아랍에미리트를 시작으로, 4월 미국, 6월 베트남, 10월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11월 영국을 거쳐 12월 네덜란드까지 국빈 방문 행진이 이어졌습니다. 2023년 한 해를 국빈 방문으로 열고 국빈 방문으로 닫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국빈 방문이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국빈 방문이란 한 나라의 원수가 상대국 원수의 공식 초청을 받아 방문하는 일을 일컫습니다.
▲ 영국 국빈 방문 중 황금마차를 함께 탄 카밀라 영국 왕비와 김건희 여사. 2023.11.21 |
ⓒ 영국 왕실 |
국가 원수의 외국 방문은 의전의 격식에 따라 국빈 방문, 공식 방문, 공식 실무방문, 실무방문, 사적 방문 등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초청국이 제공하는 의전의 격이 높다고 해서 초청국이 방문국을 다른 나라보다 더 존경한다거나 더 중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청국이 화려한 대접을 원하는 방문국 지도자의 허영심을 이용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프랑스를 국빈 방문했을 때는 프랑스가 우리나라의 국빈 방문 요청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당시 고속철도 사업에서 일본의 신칸센과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던 프랑스 테제베의 도입을 요구해 관철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의 11월 영국 국빈 방문도 개운치 않습니다. 영국은 1년에 단 두 차례만 국빈 방문을 받기 때문에 국빈 방문의 진입 장벽이 꽤 높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입장료가 꽤 비싼 편입니다. 그런데 마침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 국빈 방문 때 무려 34조 원의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반면 영국으로부터 끌어낸 투자는 겨우 1조 5천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올해 국빈 방문한 7개국 중 3개국이 아랍 국가였습니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입니다. 대통령 부인 김건희씨는 이 세 나라를 포함해 7개 나라의 국빈 방문 행사에 빠짐없이 동행했습니다. 아랍 나라들을 방문할 때는 마치 정상이라도 되는 양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이런 모습을 화보로 홍보까지 했습니다.
▲ 사우디아라비아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리야드의 야마마궁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왕세자 겸 총리의 영접을 받은 뒤 회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뒤에 김건희 여사. |
ⓒ 연합뉴스 |
네덜란드 항의 기사, 정권 장악력 약화 신호
마침 윤 대통령의 네덜란드 방문 뒤 귀국 시점에 맞추어 이와 관련한 매우 충격적인 뉴스가 나왔습니다. <중앙일보>가 15일 네덜란드 정부가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 열흘 전에 네덜란드 주재 한국 대사를 불러 과도한 경호와 의전을 요구하는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고 단독으로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호상의 필요를 이유로 방문지의 엘리베이터 면적까지 요구한 것 등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불만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이에 관해 외교부는 부랴부랴 '초치가 아니라 협의'라고 변명하며 대사를 부른 것을 인정하면서 "국가를 불문하고 행사 의전 관련한 상세 사항에 대해 언제나 이견이나 상이한 점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외교부의 이 반론이 사실상 중앙일보 보도를 시인한 것이라고 봅니다. 의전에 대한 이견을 둘러싸고 주재국 대사까지 불렀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아니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외교 참사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외교 의전 관례 속에서는 절대 나오기 어렵습니다.
▲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벨트호벤 소재 ASML 본사를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가운데)과 함께 방문해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오른쪽)의 안내를 받고 있다. 2023.12.13 |
ⓒ 연합뉴스 |
속 빈 강정 '반도체 동맹'
윤 정권은 이번 네덜란드 방문의 의의를 '반도체 동맹'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과 마크 루터 네덜란드 총리가 발표한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보면, 윤 정부가 부각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반도체 동맹'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공동성명은 전문과 20개 항으로 구성돼 있는데 반도체 동맹이란 용어는 12번째 항에 나옵니다. "양 정상은 반도체 가치 사슬에 있어 양국의 특별한 상호보완적 관계를 인식하고 정부, 기업, 대학을 아우르는 반도체 동맹 구축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라는 대목인데, 그것도 우리 정부가 설명하듯이 협력 관계에서 동맹 관계로 격상하는 내용이 아니라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총리 방한 때 했던 합의한 내용을 재확인한다는 표현입니다.
또 공동성명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양국의 반도체 동맹에 관한 강조점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반도체 동맹'이라는 단어와 함께 반도체가 들어가는 용어를 10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루터 총리는 양국 경제협력의 한 예로 '반도체 산업'이란 단어를 단 1번만 썼습니다. 오히려 네덜란드 쪽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군사 지원과 양국 간 국방 협력에 더욱 관심을 두는 모습이었습니다.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입니다. 국내 정치가 잘 돼야 외교도 잘 작동할 수 있습니다. 또 내용과 형식이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과도한 의전에 취해 내용이 부실해진다면 그런 외교는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국내 정치가 엉망진창이고 화려한 의전과 대접에만 신경 쓰는 윤석열 정권의 외교는 시작부터 실패를 내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속 빈 강정'으로 끝낸 이번 네덜란드 국빈 외교는 그런 외교의 대표 사례로 기록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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