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고등학생들 묵직한 소감, 단체관람 필요한 이유
[서부원 기자]
▲ 영화 '서울의 봄' 개봉 18일째 600만명 돌파 흥행 가도를 달리는 영화 '서울의 봄'이 지난 9일 관객 600만명을 돌파했다. 배급사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서울의 봄'은 개봉한 지 18일째인 이날 새벽 누적 관객 수 600만명을 넘어섰다. 사진은 10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영화관 모습. |
ⓒ 연합뉴스 |
영화 <서울의 봄> 단체 관람 계획이 극우 유튜브 채널의 주장을 앞세운 민원에 의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가짜 뉴스인 줄 알았다. '더러운 좌빨 교육을 막아야 한다'는 선동에 부화뇌동한 일부 학부모의 등쌀에 학교가 무릎을 꿇은 모양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경북 포항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아이들도 뉴스를 들은 걸까. 이튿날 필자의 담임 학급에선 영화를 단체 관람하자는 아이들의 아우성으로 시끌벅적했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영화를 볼 짬이 없었다며 기말고사가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온통 <서울의 봄> 이야기뿐이냐며, 안 보면 왕따 당할 분위기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러잖아도 학급엔 올해 안에 써야 할 돈이 남아있었다. 지난 여름방학을 앞두고 열린 반별 대항 교내 합창제 때 부상으로 받은 상금이다. 기껏해야 1인당 1만 원 정도라 큰 액수는 아니지만, 이를 어떻게 쓸 것인지를 두고 반 아이들끼리 몇 개월 동안 설왕설래하던 차였다.
여느 때라면 교실에서 피자 파티를 하자거나 방과 후에 프로야구 보러 가자고 떠들썩했을 테지만, 이번엔 그런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서류 문제로 행정실에서 난색을 표해 무산되긴 했지만,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 난민 돕기 성금으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와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갑툭튀' 영화 단체 관람 이야기가 나온 거다.
어느 날에 볼 것인지를 두고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영화 관람 자체에 몽니 부리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이미 봤다는 아이조차 이 영화의 경우 'N차 관람'이 대세라며 흔쾌히 동의했다. 이를 우려하는 학부모의 민원도 물론 없었다. 한 학부모는 주말에 가족이 함께 관람할 계획이라며, 민원은커녕 되레 아이의 스포일러를 걱정했다.
학교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영화 한 편'
▲ 영화 '서울의 봄' |
ⓒ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무엇보다 아이들에겐 소재 자체가 매력적이다. '역사가 스포일러'라지만, 12.12 군사 반란은 아직 아이들에게 낯선 역사다. 교과서에서 여전히 소략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1979년 말에서 1980년 초로 이어지는 숨 가빴던 역사가 교과서에선 달랑 세 문장으로 갈무리된다. 더욱이 10.26 사태와 12.12 군사 반란이 다른 주제 단원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감이 커졌다. 그러나 전두환의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군사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2.12 사태). 1980년이 되자 유신 헌법의 폐지와 신군부 퇴진,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서울의 봄).'
12.12가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망각한 신군부의 만행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학교 수업에서 상세히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이들에겐 10.26과 5.18 사이에 끼어 수박 겉핥기식으로 건너뛰는 평범한 사건 중의 하나로 기억될 뿐이다. 심지어 군 내부의 권력 투쟁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전두환이 저지른 악행을 손꼽아보라고 하면, 대부분 5.18과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한 이른바 '3S 정책'을 앞세운다. 더러 '땡전 뉴스'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삼청교육대를 언급하는 아이도 있다. 현대사 '덕후'라면, 녹화 사업과 금강산 댐 조작 사건, 부천경찰서 대학생 성고문 사건까지 거론한다. 지금껏 12.12를 첫손에 꼽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12.12가 우리 현대사에 미친 해악을 아이들도 분명히 알게 됐다. 교과서의 손 빠진 부분을 영화가 너끈히 메꿔주었다. 아이들은 10.26과 5.18, 나아가 6월 민주항쟁 사이의 인과관계가 이로써 완벽하게 설명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관람 후 아이들이 남긴 소감 중 인상적인 몇 가지만 소개한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는 대사 한마디에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들렸다."
"전두환이 현실에선 이겼지만, 역사에선 졌다.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영화다."
"전두환과 노태우 말고도 직속상관을 배반하고 반란군 편에 선 실존 인물들을 기록으로 남겨 반드시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반란군에 맞서 싸운 이들의 이름을 되새기는 게 먼저다. 그들에 대한 예우가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유능한 적군'보다 '무능한 아군'이 더 무섭다.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이름도 기억해야 한다."
"반란군의 승리를 넋 놓고 지켜보고만 있던 시민들의 책임도 없지 않아 보인다. 영화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반란군과 한통속이 되어 시민들의 눈을 가린 언론사도 있었을 것 같다."
아이들의 묵직한 소감을 읽노라니, 기말고사도 끝났으니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단체 관람하면 좋겠다 싶다. 중고등학생 정도면 영화 속 허구와 사실을 충분히 구별해낼 수 있을뿐더러, 그것들을 소재 삼아 별도의 역사 수업을 꾸릴 수도 있다. 며칠 전이 12월 12일이었으니, 계기 교육 자료로도 시의적절하다. 역사 교사로서, 무척 고마운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것처럼, 12.12가 10.26에서 비롯됐잖아요. 그럼 10.26이 일어난 직접적 원인은 뭐죠?"
한 아이의 돌발 질문에 무릎을 쳤다. 그는 역사란 끊임없는 인과관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 저절로 깨닫게 된 셈이다. 마치 블록 조립하듯 복선과 인과관계를 따져보려는 호기심은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만의 묘미다. 답변 대신 스스로 답을 찾아보도록 과제로 내주었다. 물론, 10.26 열흘 전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이 맨 먼저 거론될 테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사회과 교사들끼리 경남 창원(마산) 일대를 답사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학교 내 교사의 교육력 제고를 위한 전문적 학습 공동체 프로그램의 하나로, 기말고사가 끝난 주말인 16일에 떠나기로 정해졌다. 그런데, 소식이 퍼지자 함께 가고 싶다는 아이들이 순식간에 줄을 섰다. 이 역시 영화 <서울의 봄>이 퍼트린 '선한 영향력'이다.
사족. 단체 관람 계획을 '좌빨 교육'으로 몰아세운 일부 극우 유튜버들의 망동을 굳이 여기서 문제 삼고 싶진 않다. 다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행태에 주눅이 들어 멀쩡한 계획을 취소한 해당 학교의 소심함이 안타깝다. 학교의 그 많은 교사 중에 그들의 몰상식한 주장에 당당히 맞선 이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같은 교사로서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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