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여왕' 전도연의 전설, 이때부터 시작됐다

양형석 2023. 12. 1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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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1997년 한국영화 최다 관객에 빛나는 <접속>

[양형석 기자]

199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들이면 'PC통신'을 누구보다 잘 안다. PC통신은 천리안과 하이텔이라는 양대산맥을 필두로 1994년 나우누리, 1996년 유니텔이 가세하면서 90년대 중·후반, 10-20세대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대호황을 이뤘다. 당시 PC통신을 사용했던 유저라면 PC통신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엄청난 전화비 폭탄으로 부모님께 큰 꾸지람을 들었던 웃지 못할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PC통신에는 지금의 포털사이트처럼 여러 가지 기능이 있었지만 'PC통신의 꽃'으로 불리며 젊은 유저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기능은 단연 채팅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아이디와 닉네임만으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채팅은 단연 최고의 인기였다. 그 시절 PC통신 유저라면 랜선 안에서 서로 기쁨을 나누고 고민도 털어 놓을 수 있는 '채팅친구' 한 명쯤은 필수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지 않고 채팅으로만 친분을 나눴던 사람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실제 상대의 얼굴과 성격이 궁금해 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채팅으로 친분을 쌓은 유저들 중에는 일명 '번개'를 통해 실제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PC통신이 한창 유행하던 지난 1997년에는 채팅을 주요소재로 다룬 멜로영화가 개봉해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훗날 '칸의 여왕'으로 성장하는 전도연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한 장윤현 감독의 <접속>이다.
 
 <접속>은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었음에도 1997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 (주)명필름
 
채팅을 소재로 만들었거나 채팅이 등장하는 영화들

채팅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다. 영화에서도 채팅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영화 속에서 지나가는 장면으로 등장하거나 주요소재로 사용되면서 관객들에게 시대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곤 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작을 알렸다고 평가 받는 강제규 감독의 <쉬리>에서는 북한군의 채팅장면이 나온다. 액체폭탄 CTX를 탈취하기 위해 한국으로 내려온 박무영(최민식 분)과 고정간첩 이명현(김윤진 분)이 채팅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임무를 하달하는 장면이었다. 이는 <쉬리>의 배급사이자 투자사였던 삼성영상사업단을 위한 간접광고(PPL)로 두 사람은 삼성 SDS에서 개발·운영했던 PC통신 유니텔을 살짝 변형한 채팅창을 사용했다.

채팅게임을 소재로 한 최호 감독의 <후아유>는 서울관객 9만1000명으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조승우와 이나영의 리즈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로 관객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후아유>에서 형태(조승우 분)와 인주(이나영 분)는 채팅게임 속에서 각각 멜로와 별이라는 닉네임을 만들어 현실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만든다. 특히 멜로가 별이를 위로하기 위해 부르는 통기타 라이브는 최고의 OST 넘버 중 하나로 꼽힌다.

할리우드에서는 채팅관련영화가 공포나 스릴러 장르에 많이 쓰이곤 한다. "지금 당장 SNS를 탈퇴하라"라는 다소 무서운 카피의 영화 <디스커넥트>는 세 편의 짧은 단편들을 묶은 영화로 SNS를 통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주인공들의 사례를 보여주며 SNS의 부정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디스커넥트>에서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비극을 보면 당장 SNS를 탈퇴하고 아날로그 시대로 돌아가야 할 거 같은 착각마저 든다.

국내에서 지난 11월에 개봉한 <세이퍼 앳 홈>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각자의 집에서 화상채팅을 통해 '랜선파티'를 즐기던 친구들이 차례로 비극적인 일에 연루된다는 내용의 호러 스릴러 영화다. 실제로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5인 이상 집합금지가 내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랜선만남을 통해 아쉬움을 달래곤 했는데 <세이퍼 앳 홈>은 랜선모임조차 안전하다고 믿으면 곤란하다고 경고하는 영화였다.

촬영장소, OST까지 화제 됐던 영화
 
 전도연(왼쪽)과 한석규가 레코드 가게 계단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접속>의 최고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 (주)명필름
 
1990년 CF를 통해 데뷔한 전도연은 <우리들의 천국>,<종합병원>,<사랑은 블루>,<젊은이의 양지> 등 여러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데뷔 초기에는 '청춘스타'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1997년 데뷔 후 처음으로 선택한 영화 <접속>에서 성숙한 연기를 선보이며 대종상, 청룡영화상 신인상과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휩쓸었고 이어 <약속>과 <내 마음의 풍금>,<해피 엔드>를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단기간에 충무로 최고의 여성배우로 떠올랐다.

물론 최고의 스타배우 한석규가 출연했지만 신인 장윤현 감독 연출에 전도연의 스크린 데뷔작이었던 <접속>은 흥행 기대작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영화의 스토리와 분위기 역시 정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자칫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장르였다. 하지만 <접속>은 PC통신 세대들의 감성을 건드리며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고 서울 관객 67만으로 1997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최다관객을 동원했다(외화 및 전체 1위는 <타이타닉>).

영화 속 주요 배경이 된 종로 3가의 피카디리 극장과 그 주변 역시 영화팬들이 다시 찾는 장소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피카디리 극장은 2007년 프리머스시네마와 2010년 롯데시네마를 거쳐 2015년부터 'CGV피카디리1958'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동현(한석규 분)과 수현(전도연 분)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자 영화의 엔딩 장면이 된 피카디리 극장 앞 거리와 피카디리 극장 2층에 위치한 카페는 영화 개봉 후 관객들의 명소가 됐다.

<접속>이 큰 사랑을 받았던 요인에는 OST도 큰 몫을 담당했다. 사실 영화에서는 동현의 옛 연인이 좋아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 Pale Blue Eyes >가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관객들은 영화의 엔딩곡으로 쓰인 사라 본의 < A Lover's concerto >에 더욱 열광했다. <접속>의 OST가 큰 사랑을 받자 <약속>(제시카의 <Good-Bye>), <쉬리>(캐롤 키드의 <When I Dream>) 등 외국곡을 주제가로 쓰는 한국영화가 부쩍 늘어나기도 했다.

<접속>을 연출한 장윤현 감독은 장편 데뷔작을 통해 대종상과 한국영화평론가 협회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장윤현 감독은 아쉽게도 관객들의 기대만큼 대성하진 못했다. 세기말에 개봉한 <텔미썸딩>이 123만 관객을 기록했지만 2000년대에 만든 <썸>과 <황진이>는 나란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장윤현 감독은 2012년 <가비>를 끝으로 10년 넘게 새 작품을 선보이지 않고 있다.

남자주인공을 짝사랑한 비운의 서브여주인공
 
 <접속>에서 은희를 연기한 추상미는 2018년 한국전쟁고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 (주)명필름
 
TV홈쇼핑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일을 하는 수현은 룸메이트 희진(강민영 분)의 남자친구를 짝사랑한다. 겉으로는 쿨한 척 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일일이 신경을 쓰고 룸메이트와 남자친구가 헤어지자 그에게 고백하기 위해 포항까지 내려간다. <접속>에서 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자신의 어장 속에 가둔 나쁜 남자 기철 역을 맡은 배우는 선악을 오가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태우였다.

수현에게 기철이 있었다면 라디오PD 동현에게는 자신이 연출하는 프로그램의 작가 은희가 있다. 은희는 직장상사 태호(박용수 분)의 일방적인 구애를 받고 있음에도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동현을 짝사랑한다. 은희는 동현이 방송국을 떠나 호주 이민을 준비할 때 동현을 찾아가 수현이 동현을 만나기 위해 방송국에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동현과 수현이 만나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은희는 배우 추상미가 연기했다.

<야인시대>의 신마적으로 유명한 배우 최철호는 신인 시절이던 1997년 <접속>에서 음반가게를 운영하는 동현의 친구 민영을 연기했다. <접속>의 최고 명장면(한석규와 전도연이 계단에서 교차해 지나가는 장소)의 배경이 바로 민영의 레코드가게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최철호는 <야인시대>를 비롯해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여준 거칠고 터프한 이미지와 달리 <접속>에서는 조용하고 지적인 캐릭터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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