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업보(業報)는 절대 번지수를 잊지 않는다”
영화 ‘존 윅(John Wick)’ 시리즈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킬러들의 무자비한 세계를 그린 영화라고 하지만 과연 이렇게까지 영화를 찍어야 하는가 싶을 정도다. 키아누 리브스가 아니라면 영화를 끝까지 보기가 힘들 것 같다.
‘존 윅 4’에는 파리의 에펠탑과 개선문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고 베를린과 오사카도 나온다. 오사카 콘티넨털 호텔의 총지배인 코지(시나다 히로유키 분)는 부나방처럼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옛 친구인 존 윅에게 말한다.
“좋은 죽음은 좋은 인생 뒤에만 오는 법이야.(A good death only comes after a good life.)”
존 윅이 답한다.
“우린 좋은 인생 따위 저버린 지 오래잖나.(You and I left a good life behind a long time ago.)”
스쳐 지나가듯 주고받은 짤막한 대사지만 이 영화는 인생의 묵직한 화두(話頭)를 던진다. 인간의 업보(業報·Karma)다.
영화 ‘로드 투 퍼디션(Road to Pedition)’은 업보를 소재로 한 범죄 드라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많은 대사 중 영화 주제를 압축하는 하나의 대사를 고르라면 단연 다음 대사가 아닐까.
“업보는 절대 번지수를 잊지 않는다.(Karma never loses an address.)”
영화는 금주령(禁酒令) 이후 마피아 전성시대였던 1930년대 미국. 마피아 보스의 양아들로 들어가 조직을 위해 살인을 마다 않는 주인공. 그는 두 아들에게 차마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할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날 보스의 친아들에게 아내와 아들이 살해당한다. 영화는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업보는 절대 번지수를 잊지 않는다’는 표현은 다르지만 성경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성경 말씀의 ‘뿌린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가 그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주일 목사의 설교도 결국 업보에 관한 말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말도 전해진다. ‘인과응보는 시차(時差)는 있어도 오차(誤差)는 없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고인이 생전에 베푼 선행이나 업적들이 기억난다면 그 사람은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인공은 애버니지 스크루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스크루지! 그가 얼마나 이웃에 악독한 인간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개들조차 멀리서 스크루지가 나타나면 꼬리를 내리고 피해 간다는 대목이 압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엔 웃음이 나오지만 씁쓸해 오래도록 기억된다. 개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기막히게 알아차린다. 얼마나 스크루지가 못되게 굴었으면 말 못 하는 짐승까지 저럴까.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유령 세 명을 만난다. 첫 번째 유령은 그의 어린 시절을, 두 번째 유령은 그의 현재를, 마지막 유령은 그의 죽은 뒤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 번째 유령이 데려다 준 곳의 집에서는 부부가 어떤 이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단 한마디도 망자를 안타까워하거나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 죽었다고 비웃는다. 스크루지는 묘지를 가보고 그 망자가 바로 자기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이런 어록을 남겼다.
“죽음보다는 추한 삶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스크루지는 자신의 ‘추한 삶’을 미리 가서 보고 개과천선해 새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 ‘크리스마스 캐럴’의 메시지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메시지도 비슷하다. 인간이 양심을 저버렸을 때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가.
죽음은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망자의 입장에서 본 죽음과 유족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죽음이다. 먼저 유족의 입장에서 본 부모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유족은 부모가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시길 바라면서도 자식들과 ‘죽음의 의례’를 거치길 희망한다. 자식들 얼굴도 보고 손주들도 보고…. 그 소망을 압축한 표현이 9988234다.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 아프고 사흘째 죽는다.
그러나 죽는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죽음의 의례’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죽음의 의례’에는 곧 고통이 따라온다. 고통을 느끼고 견디는 것은 온전히 죽어가는 사람의 몫이다.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작고한 어머니가 막내아들에게 입만 열면 하시던 말씀이 “아프지 않고 죽고 싶다”였다.
그렇다. 이 세상 모든 노인들의 소망은 하나로 수렴된다. 아프지 않고 죽고 싶다. 아프지 않고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망자의 세계로 건너가고 싶다. 아프지 않고 가는 것이 행복한 죽음이고 좋은 죽음이다. 그래서 잠자다 죽는 것을 천복이라 하지 않던가.
찰리 채플린은 1977년 12월25일 스위스 자택에서 잠을 자다 영면했다. 천수(天壽)를 누린 채플린은 어떻게 죽는 순간까지 그런 천복(天福)을 누렸을까. 나는 세상 사람을 웃게 해준 채플린에 대해 신이 보여준 최소한의 감사 표시라고 생각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번에도 우리는 찰스 디킨스를 불러와야 한다. 디킨스가 1861년에 발표한 작품이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이다. 1917년 ‘위대한 유산’이 무성영화로 제작되었다. 그 뒤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위대한 유산’은 18회나 영화로 나왔다. 왜 그럴까. 나온 지 160년이 넘었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위대한 유산’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인물은 조 가저리(Joe Gargery)다. 허영에 물든 신사의 세계를 동경해 신사를 흉내 내는 필립 핍(Philip Pip)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조 가저리는 누나의 남편이다. 평생 성실한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우직한 소시민이다. 그런데 런던 신사의 세계에서 한때 잘 나가던 핍이 나락으로 떨어져 그를 찾아온다. 가저리는 그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도와준다.
디킨스는 말한다. 잘 사는 인생이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성실하게 직분(職分)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를 파블로 피카소는 조금 근사하게 변형시킨다. ‘삶의 의미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게 돕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보면 깨닫게 된다. 평생 직분을 다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직책이 부여하는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하는 일. 소방대원은 사람들이 내려오는 길을 거꾸로 올라가는 직업이다. 소방대원의 직분은 내려오는 계단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소방대원이 연기 자욱한 계단을 올라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어떤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 각 부분에서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람들 덕분이다. 상인은 상인의 직분, 공무원은 공무원의 직분, 교수는 교수의 직분, 경찰은 경찰의 직분, 기자는 기자의 직분, 검사는 검사의 직분, 엔지니어는 엔지니어의 직분…. 사람이 각자의 직분을 망각할 때 개인은 불행해지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이형기 시인 ‘낙화’를 자주 암송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번뿐인 인생에서 잘 사는 것은 무엇인가. 한여름의 격정을 다 떨궈버린 겨울 산을 볼 때마다 자문하곤 한다. ‘메멘토 모리’를 기억하며 지금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아닐까.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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