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자금 4000만원 날린 60대, 하마터면 사기범 될 뻔…무슨일

신혜연 2023. 12.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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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퇴직 후 생활비를 충당할만한 투자처를 찾던 이모(64)씨는 “선물 투자로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광고 메시지를 믿고 모르는 이에게 돈을 맡겼다가 4000만원을 떼였다. 투자 사기였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씨는 사기 피해자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쪽지가 쏟아졌고, 그 중 솔깃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피해금액 확실히 받아드릴게요. 돈 돌려 받고나면 8%만 떼어주시면 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자신들을 ‘환불대행업체’ 직원이라고 밝힌 쪽지 발신자는 이씨에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돈을 돌려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노후자금을 날렸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던 이씨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업체 관계자는 이씨에게 “사기꾼이 계좌에서 돈을 빼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금융기관에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했으니 상대방(사기꾼) 계좌에 대해 지급 정지 처리를 해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했다. 이씨는 찜찜한 마음에 “거짓말을 하라는 말이냐”고 되물었지만, “돈을 되찾을 방법은 그것 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업체 측은 또한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한 경위, 어떤 식으로 신고를 해야하는지 등 ‘거짓 보이스피싱 신고’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상세히 제시했다. “은행원과 대화할 때 꼭 조금 언성을 높여 강력하게 말해야 합니다. 혹시 경찰서부터 가라고 하면 ‘내 돈 사라지면 은행이 책임질 거냐’고 강하게 나가세요” 등의 구체적인 행동 지침도 있었다.

환불 대행 업체에서 이씨에게 알려준 가짜 보이스피싱 신고 내용. 업체에서는 보이스피싱을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경찰에 허위 신고를 할 수 있게 스토리를 짜주는 것은 물론이고, 어디에 전화해야 하는지, 어떤 어조로 전화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준다고 한다. [독자 제공]
환불 대행 업체에서 이씨에게 알려준 보이스피싱 신고 요령. 금융기관에서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경찰의 확인을 받아오라"고 요구할 경우, "내 돈이 사라지면 책임 질 거냐"며 언성을 높이라고 가이드하고 있다. 업체에서는 보이스피싱을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경찰에 허위 신고를 할 수 있게 스토리를 짜주는 것은 물론이고, 어디에 전화해야 하는지, 어떤 어조로 전화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준다고 한다. [독자 제공]


결국 이씨는 지시대로 금융기관에 계좌 지급 정지를 신청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금융기관에선 경찰이 발급한 보이스피싱 사실 확인증을 제출하라고 했다. 이씨는 사실확인증 발급을 위해 경찰서에 갔지만, ‘범죄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허위 신고를 포기한 채 발길을 돌렸다. 업체 측은 다시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사실확인증을 받아내라”고 다그쳤지만, 이씨는 허위 신고 요청만은 끝내 거절했다. 이씨는 “하마터면 범죄자가 될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하다”고 말했다.

이씨가 경찰에 허위신고를 하는 것을 망설이자, 업체 측은 "당신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허위신고를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기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보이스피싱 허위 신고를 한 경우 처벌 대상이 된다. [독자 제공]
환불 대행 업체에서는 은행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보이스피싱에 당한 것 같다"고 신고를 하도록 지침을 준다. [독자 제공]


그러나 이씨와 달리, 사기 피해금을 되찾기 위해 이런 업체들의 지시에 따라 허위로 보이스피싱 신고를 하고 사실 확인증까지 발급 받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 경우, 다음 단계는 ‘협박’이다. 환불대행업체가 사기를 친 사람에게 연락해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계좌 동결을 풀어주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자신들의 지시에 따라 허위 신고를 한 피해자의 돈을 받아내는 것이다. 협박에 성공한 환불대행업체는 일종의 성공 보수 명목으로 피해자에게 일정액을 받아 챙긴다.

금융기관에서 온 사실확인증 제출 독촉장. [독자 제공]


법조계와 피해자들에 따르면, 최근 이 같은 환불대행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과거에도 게임아이템을 잘못 산 이들에게 접근, 환불을 위한 복잡한 과정을 대신 해주고 소액의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으로 영업을 하는 환불대행업체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가 사기 피해자들로 영역을 확대하고, 지급 정지를 악용한 협박 등의 불법적인 ‘환불 수단’까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업체들은 ‘통신판매업’을 한다며 버젓이 사업체 등록까지 한 채 고객을 모으고 있다.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건 사기 피해자들이 많이 가입돼 있는 온라인 카페, 오픈 채팅방 등이다. 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쪽지를 보내거나, 관련 글 밑에 “환불을 도와주겠다”는 댓글을 수차례 남기기도 한다. 또한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환불대행’을 검색해도 ‘환불대행업체 이용 후기’나 ‘환불대행업체 고르는 법’ 등의 글이 수십개 확인된다. 대부분 업체 광고성 글이다.

포탈사이트에 나오는 환불대행업체 광고들. 환불대행업체 중 일부는 지급정지를 이용한 환불 방식을 택하고 있다. [포털사이트 캡처]

전문가들은 이런 업체의 설득에 넘어가 허위로 보이스피싱 신고를 할 경우 처벌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환불대행업체 관련 사건을 다수 수임한 법무법인 지우 김지우 변호사는 “실제로 보이스피싱 이용 계좌 지급 정지를 이용하는 환불대행업체를 통해 사기 피해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행동 때문에 오히려 형사 사건에 연루될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경찰 관계자도 “투자 사기를 당했다 해도 허위사실로 계좌 지급정지를 신청하면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의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며 “이 같은 행위를 종용한 환불대행업체 역시 당연히 공범으로 처벌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보이스피싱 등 사기 이용계좌로 신고가 접수돼 금융기관에서 계좌 지급정지 조치를 한 사례는 1만7683건에 달했다. 2020년 2191건에서 2021년 2만6321건, 지난해 3만3897건으로 해마다 대폭 증가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사기 범죄가 늘어난 측면도 있겠지만, 지급정지를 악용해 협박하거나 사적 보복을 가하는 등의 신종 범죄들 역시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혜연 기자 shin.hye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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