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대신 책으로 꽉 채웠다…이 브랜드의 지적인 접근법[비크닉]
실험실 약병 같은 갈색 병들이 오와 열을 맞춰 흐트러짐 없이 진열돼 있습니다. 들어서는 순간 번잡한 외부와는 완벽하게 차단된 편안한 정적이 흐르는 곳이죠. 눈에 거슬리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플라스틱보단 나무 혹은 스테인리스, 유리 등 자연에서 유래한 자재로 꾸며진 내부는 완벽하게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공간을 채우는 은은한 향까지도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죠.
혹시 눈치채셨나요? 길거리를 지나다 발견하면, 한 번쯤 들어가서 향을 맡으며 정신적 휴식을 취하고 싶은 장소. 바로 화장품 브랜드 이솝의 스토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솝 스토어가 지난 6월 대대적으로 변신한 적이 있어요. 선반 위 가지런히 정돈된 제품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책으로 채웠죠. 바로 이솝 가로수길 스토어와 한남 스토어에서 열린 ‘우먼스 라이브러리’ 얘기입니다. 코스메틱 브랜드에서 제품 대신 책이라니, 흥미롭지 않나요?
왜 이솝은 이날 제품들 대신 책을 진열해뒀을까요? 오늘은 이솝이 만든 세계와 그 세계를 그토록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동력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해요.
서울 상륙한 이솝 도서관
올해 6월 열렸던 ‘이솝 라이브러리’는 그간 이솝이 진행했던 여러 캠페인 가운데 가장 이솝다웠던 캠페인이었습니다. 코스메틱 브랜드의 캠페인이면서도 단 하나의 제품도 등장하지 않은 매우 이례적인 캠페인이기도 했고요. 주인공은 바로 책, 그중에서도 한국 여성 작가 14인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이날만큼은 스토어 공간을 채운 이솝 제품 특유의 향 사이로 종이 냄새가 가득했죠.
이솝 라이브러리는 지난 2021년 미국과 캐나다에 위치한 이솝 스토어 세 곳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성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퀴어 라이브러리’를 주제로 개최됐죠. 이후 캐나다·유럽을 거쳐 지난해부터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아시아 지역에서도 열렸고요. 지난 5월 23일에는 서울 한남동에, 6월 1일에는 가로수길에 상륙했습니다. 각각 약 2주씩 진행됐던 우먼스 라이브러리 기간 두 스토어는 제품을 위한 진열용 선반을 책에 잠시 양보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이솝 라이브러리의 타이틀은 ‘이솝 우먼스 라이브러리-글로 쓴 예술과 문화, 그리고 삶’이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를 대변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여성 작가들의 14개 작품을 소개했죠.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손보미 작가의 『우연의 신』(현대문학),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 (난다) 등 신진 작가와 기성 작가 작품을 비롯해 장·단편 소설, 시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가 포함됐고요.
이 기간 스토어에 방문한 고객들은 제품 대신 자신이 원하는 책을 한 권 고르면 됩니다. 다음 카운터로 가면 늘 이솝 제품을 포장해주던 코튼백에 담아주죠. 코튼백에 이솝 향수를 뿌려주는 것도 잊지 않고요. 물론 한쪽에서는 여전히 원하는 이솝 제품을 테스트할 수 있어요. 이솝 스토어의 트레이드마크인 ‘싱크 데모(제품 시험용 싱크)’는 여전히 운영했으니까요. 또 스토어 한쪽에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조용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가로수길의 경우 2층 전체가 조용한 서가와 소파가 있는 여느 도서관과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졌죠.
이솝 우화처럼, 간결하게 농축하다
이솝은 광고하지 않는 브랜드로 유명합니다. TV 광고는 물론, 그 흔한 잡지 광고조차 하지 않죠. 그러면 어떻게 브랜드를 알릴 수 있을까요? 글쎄요,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좋은 제품과 훌륭한 스토어입니다.
이솝의 오프라인 스토어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광고입니다. 이솝 특유의 잘 정돈된 스토어가 시각적 광고 역할을 하고, 스토어에서 주는 고객 경험이 마케팅이 되며, 그곳에서 진행되는 활동이 캠페인이 되는 거죠. 이솝의 ‘우먼스 라이브러리’는 그러니까, 이솝이 브랜드를 알리는 중요한 활동의 하나로 기획된 겁니다.
그런데 코스메틱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의 활동이 도서관이라니 조금 독특하죠. 하지만 이솝이 추구하는 브랜드의 결을 가만히 따라가 보면 이런 ‘문학적’ ‘지적’ 교류가 이번 한 번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솝이라는 브랜드 이름 자체도 고대 그리스의 이솝 우화에서 따온 것이고요.
약점이나 불안감을 이용하지 않는다
이솝은 1987년 호주 멜버른에서 만들어진 스킨케어 브랜드입니다. 창립자 데니스 파피티스(Dennis Paphitis)는 질 좋은 코스메틱 제품을 구상하면서 짧고 간결하지만 몇 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 일관된 진실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솝 우화를 떠올렸습니다. 삶의 본질적인 지혜가 응축된 이야기처럼, 본질적 효능을 농축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인 거죠.
브랜드의 출발부터 그래서였을까요. 이솝은 지난 30여 년 동안 ‘지적 교류를 통한 균형 잡힌 삶’을 지속해서 추구해왔습니다. 그 중심에는 항상 문학이 있었고요. 뷰티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로는 조금 독특하죠. 혹시 발견하신 적이 있나요? 이솝 제품의 패키지에 쓰여 있는 격언과 문장들, 삶의 지혜들을요. 예를 들어 올해 출시한 리프레시 바 솝(비누)에는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인 카운티 컬린(Countee Cullen)의 ‘I have a rendezvous with life(나는 삶과 만나기로 했네)’라는 인용구가 쓰여있죠.
또 이솝은 제품의 정확한 정보만 전달할 뿐 고객의 약점이나 불안감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가지고 있어요. 캠페인 자료에 ‘주름 고민 개선’ 대신 지혜를 주는 한 줄을 적어둔 것처럼요.
어른들을 위한 침대맡 동화
이솝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지난 2016년부터 2020년까지 호주 주간지 ‘새터데이 페이퍼’와 함께 에세이 공모전 ‘더 혼 프라이즈(The Horne Prize)’를 주관했습니다. 세계적인 문학 전문지 ‘파리스 리뷰(The Paris Review)’와 협력해 뉴욕의 이솝 첼시 스토어의 벽과 천장을 페이지와 표지로 장식하기도 했고요.
흥미로운 프로젝트도 진행합니다. 바로 ‘이솝 미래 우화’인데요. 문학 전문 웹사이트 ‘리터리러 허브’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지난해부터 작가들과 함께 어른들을 위한 침대맡 이야기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팟캐스트를 통해 공개되고요.
소설가 가와카미 미에코의 ‘잠은 모두 그녀의 것’, 저널리스트 아멜리아 아브라함의 ‘쥐와 햄스터’ 등의 작품들이 공개됐습니다. 약 7~8분가량 이어지는 팟캐스트는 동시대 작가들의 교훈적 우화를 통해 현대의 도덕성에 대해 다루죠.
이솝의 문학적 행보는 한국에서도 이어집니다. 지난 2019년부터 여러 작가와 함께 파리스 리뷰에 실린 단편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진행해왔습니다. 이솝 사운즈 한남과 한남, 가로수길 스토어에서 문학 전문지 ‘파리스 리뷰’를 판매하고 있고요.
또 한남 스토어에 가면 책장에 비치된 책을 상시로 볼 수 있도록 안락한 소파를 비치해 두었어요. 방문객들은 정원이 보이는 소파에 앉아 편안한 독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죠. 지난 2021년에는 오래된 펭귄북스 도서를 새 책으로 교환할 수 있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솝은 왜 이렇게 문학에 천착하는 걸까요? 이솝의 세계관에서는 창의적 추구와 지적 호기심을 훌륭한 삶의 필수적인 요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솝이 만든 우아한 세계
이솝은 브랜딩의 모범 사례로 꼽힙니다.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의 화장실에 가면 왜 늘 이솝 핸드 워시가 있을까요? 공간을 고급스럽게 만들고 싶을 때 화룡점정처럼 이솝 제품을 가져다 놓는 이유는요. 소비자들 사이 ‘이솝=고급스러움’이라는 연상 작용 덕분이겠죠. 좋은 공간에 가면 늘 놓여있으니, 이솝이 스스로 광고나 마케팅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 효능에 기반을 둔 심플한 패키지, 독특한 아로마와 에센셜 오일의 향, 한옥 등 지역색을 살린 유니크한 스토어 인테리어, 싱크 데모와 1:1 컨설턴트 등 환대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는 사려 깊은 스토어 경험 등. 이솝의 성공 비결은 다양하게 꼽을 수 있겠지만, 딱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특유의 ‘세계관’일 겁니다
세상에는 이미 수만 개의 스킨케어 브랜드가 존재합니다. 기능만으로는 차별화하기 어렵죠. 대신 어떤 브랜드나 제품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어떨까요. 물건이 아니라 생활을 판다는 감각으로요.
요즘 뷰티 업계를 포함, 수많은 브랜드가 이런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를 표방합니다. 제품 스펙의 경쟁이 끝난 지금,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제품이 주는 가치겠죠. 기능 충족은 기본, 내가 추구하는 삶의 스타일과 결이 맞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솝은 화려한 수식어나 신제품을 내세우기보다 특유의 세계관을 만드는 데 공들여왔습니다. 문학과 예술에 기반을 둔 다양한 활동들은 그 세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훌륭한 질료가 됐고요.
번잡한 일상을 뒤로하고 한 템포 쉬어가고 싶을 때, 삶의 균형을 찾고 싶을 때 자연스레 이솝의 제품들을 떠올립니다. 단순히 뷰티 브랜드를 넘어 삶의 철학까지 투영할 수 있는 브랜드. 이솝의 브랜딩이 남다른 이유, 바로 이것 아닐까요.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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