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를 법정에 세운 미래세대… “온실가스 감축 부담 전가 말라”
해외 “기후변화는 정부 책임” 잇단 판결… 韓은 묵묵부답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에 기후위기 헌법소원을 낸 청구인 중에는 ‘딱따구리’라는 태명의 태아가 있었다. 정부가 탄소중립기본법 시행령에서 규정한 온실가스 배출 감축 목표가 너무 낮아 기본권이 침해된다는 게 헌법소원 청구 요지였다. 한국 정부는 관련 시행령에서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줄이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소송을 낸 지 1년6개월이 지났지만 헌법재판소는 아직 헌법소원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유사한 기후 소송이 헌재에 모두 5건 계류 중이다.
김형두 헌법재판관은 지난달 29일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국제콘퍼런스에서 “청구 당시 태아였던 딱따구리가 지금은 세상에 태어났다”며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어서 지구온난화 문제도 시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재판관은 “지구 온난화의 특징은 비가역성(물질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성질)”이라며 “만약 대기 중에 배출돼 축적된 탄소량이 변곡점을 지나면 전 지구는 매우 심각한 기후재앙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달리 유럽과 미국에선 기후 변화와 관련해 국가·기업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법원 판단이 이미 나왔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미비해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수많은 ‘딱따구리’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15일 환경단체 기후솔루션에 따르면 이 같은 판단을 구하는 기후위기 소송은 올해 초까지 전 세계 2200건 이상 제기됐다. 진행 중인 사건만 100건 이상으로 추산된다. 미국에서 여러 기후소송을 대리한 매리 우드 오리건대 교수는 같은 콘퍼런스에서 “행정부와 입법부를 대상으로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소용이 없어 사법부에 마지막 구제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위기를 둘러싼 법정 다툼이 본격화한 계기는 네덜란드 우르헨다 판결이다. 네덜란드 환경단체 우르헨다는 2013년 네덜란드 정부의 ‘1990년 대비 2020년까지 14~17%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상향 조정해야 한다며 시민들과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이 2015년 원고 승소 판결했고, 2심에 이어 네덜란드 대법원도 2019년 최종적으로 우르헨다 손을 들어줬다.
법원 판단 기준은 유럽인권협약이었다. 네덜란드 대법원은 유럽인권협약 2조(생명권)와 8조(사생활 및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 위반 주장을 인정했고, 온실가스 배출량을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최소 25% 감축하라고 명령했다. 우르헨다 측을 대리한 데니스 반 베르켈 변호사는 콘퍼런스에서 “대법원은 기후변화가 생명을 앗아가고 가족을 파괴할 수 있는 실질적 위협이라고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우르헨다 판결은 기후위기에 대한 정부 책임을 ‘상징적’ 영역에서 ‘실질’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네덜란드 정부는 우르헨다 판결을 정책에 반영한 후 실제 감축 목표를 달성했다. 기후소송이 선언적 판결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한 것이다. 베르켈 변호사는 “시민사회와 언론, 의원들 역할이 중요했다”며 “이들 모두 법원 판결을 무시하면 법치주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집행 관련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지난 8월 전향적 판결이 나왔다. 몬태나주 법원은 어린이 및 청소년 16명이 몬태나주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1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주정부가 화석연료 정책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침해했다고 봤다. 몬태나주는 미국의 주요 석탄 산지로, 화석 연료가 산업기반이다. 우드 교수는 “일부 국가에선 화석연료산업 측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고, 미국 법원도 수동적 입장을 보인 바 있다”며 판결 의미를 설명했다.
다만 미국의 다른 소송에서 몬태나주 판결과 같은 결론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해당 사건은 몬태나주 헌법에 명시된 환경권 조항을 기반으로 소송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우드 교수는 “이렇게 환경권 관련 헌법상 조항이 있는 주는 미국에서 6~7개밖에 되지 않는다”며 “명시적 헌법 조항뿐만 아니라 암묵적인 기본권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적 기후위기 관련 법적 논의는 국내 기후소송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국내 청구인들은 미래세대가 과도한 온실가스 감축 부담을 떠안게 되며, 사실상 화석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온실가스 감축 부담의 세대 간 형평성 문제는 독일에서도 다뤄졌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2021년 청소년들이 낸 기후소송에서 “청구인들이 2031년부터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하는 부담에 직면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게르드 빈터 독일 브레멘대 교수도 이번 콘퍼런스에서 “이 같은 미래의 침해를 피하기 위해 현재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석탄 산지인 미국 몬태나주 판결도 제조업이 주요 산업인 한국과 연관성이 있다. 한국 환경부는 최근 헌재에 낸 의견서에서 온실가스 40% 감축 목표도 산업계에 상당한 부담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기후위기 도래는 결국 산업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빈터 교수는 “독일의 경우 (판결 이후) 중공업 등 산업 부문에서도 긍정적 반응이 나왔다”며 “비즈니스를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에너지가 고갈되면 업계 또한 위협을 받는다”고 했다. 우드 교수는 “미국도 화석연료산업에 사로잡혀 있어 (반대)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며 “사법부가 시민 기본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 구제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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