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먹고살기] 이 글은 왜 쓰신 거예요?
글쓰기 강연을 하면서 많은 동서양 작가의 훌륭한 글을 소개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썼던 글도 자주 읽어주게 된다. 그런데 내가 쓴 글이라는 게 정치·사회를 다루거나 지식인의 거대담론이 담긴 논설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일상의 부스러기들이라서 민망해지곤 한다.
‘일요일 아침에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남편이 끓여다 바친 짜왕을 먹자마자 젓가락을 내던지고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는 아내가 소가 되면 어쩌나’ 걱정하는 글을 읽어주었을 때는 그저 웃고 말았지만, 회사에 도시락을 싸서 온 아내와 현금인출기에 가서 10만원을 찾아 5만원씩 나눠 가졌다는 얘기를 쓴 ‘아내와 ATM기’라는 글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분이 많았다. 자신이 이과 출신이라 그런지 모르겠다고 밝힌 한 남성은 진심으로 나에게 왜 그 글을 썼는지, 글의 숨은 의도는 무엇인지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현금 10만원을 찾아서 5만원씩 나눠 가졌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내 대답은 정직했지만 한심했다.
오랜만에 광고 아르바이트 일이 하나 들어왔다.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시절에 만났던 예전 직장 동료가 전화해서 “형, 기업 캠페인 카피 하나 써볼래요?”라고 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나도 예전에 관여한 적 있는 기업의 일이라 반가웠지만, 그동안 변한 경제 상황이나 진행하고 있는 신사업 등에 대해서는 새로 공부를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 기업의 홈페이지와 경제신문 기사 등을 섭렵하며 슬로건과 기업 스토리를 쓸 준비를 했다.
문제는 역시 스케줄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대두됐지만 최근에 갑자기 ‘회장님이 찾으시는 바람에’ 홍보실이 잔뜩 긴장해 있었고 결과적으로 하루빨리 결과물을 도출해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언제까지 슬로건 초안을 뽑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대행사 간부의 질문은 흡사 만나자마자 결혼식 날짜부터 잡자는 어설픈 중매쟁이처럼 보였다.
애가 탄 나는 저녁이면 동네 스터디카페에 가서 꼼짝 않고 카피를 쓰고 기획서를 작성했다. 괜찮은 슬로건이 몇 개 나왔고 키워드 회의를 하러 대행사를 만났을 땐 반응이 좋았다. 그런데 다음 주에 보자던 광고주가 돌연 금요일 저녁에 추가 주문을 하면서 모든 개인 스케줄은 엉망이 됐다. 예정돼 있던 저녁 식사 시간에 밖으로 나가 통화하면서도 개인사정 때문에 화상회의를 할 수 없게 돼 미안하다고 오히려 사과를 했고 주말은 밤을 꼬박 새워서 월요일로 잡힌 회의 일정에 맞춰야 했다.
광고주는 내 카피가 마음에 든다면서도 사사건건 개선할 점을 지적하기를 잊지 않았다. 메인 슬로건으로 나온 카피가 마음에 들지만 영어로 번역했을 때 ‘에지’가 살지 않는다면서 대안을 요구할 때는 어안이 벙벙했다. 늦은 밤에 이런 내용의 통화를 반복하는 걸 듣고 있던 아내도 짜증을 냈다. 나는 한 달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 기간에 몸무게가 조금 빠졌고 수면 부족으로 피부도 거칠어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서글픈 것은 내가 하던 광고라는 일의 방식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광고주가 쉬는 주말이면 하청업체도 쉬어야 한다. 이건 평등 이전에 인간의 기본 권리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대기업에서 이런 일에는 무관심했고 오로지 결과에만 몰두했다. 생각해 보니 이번 프로젝트만 그런 게 아니라 광고회사 다니는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나와 동료들은 늘 새롭고 부지런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순간 낙오자 취급을 각오해야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픽션이나 시를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돈과 자물쇠를 채울 수 있는 방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야 여행도 하고 책도 읽고 빈둥거리며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회사 일을 마친 뒤 피곤함을 무릅쓰고 그런 ‘쓸데없는’ 일상들을 글로 썼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그런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숨 쉴 틈을 찾았던 것이다. 저기, ‘아내와 ATM기’라는 글을 궁금해하신 분께 고백합니다. 저는 사실 살려고 그 글을 쓴 것 같아요. 그런 거라도 안 쓰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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