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 해결책은 원자력? 거장 감독 '논란의' 신작

김상목 2023. 12. 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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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뉴클리어 나우>

[김상목 기자]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어떤 개인의 행적 역시 그렇다. 학문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창의적 재능은 무한정 주어지지 않게 마련이다. 뒤늦게 응축했다 만개하듯 역량을 터뜨리는 이들도 종종 있지만 많은 경우 청년기에서 장년기에 거쳐 실력을 뽐내다 노년이 되면 정체 혹은 답습에 머물곤 한다. 누군가는 현실을 순응해 할 수 있는 역할을 맡으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무너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걸 지켜보는 기존에 응원하던 이들의 심경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플래툰(1986)', '월스트리트(1987)', '7월 4일생(1989)', '도어즈(1991)', 'J.F.K(1993)', '닉슨(1997)' 같은 영화들로 기억되는 올리버 스톤은 '거장'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감독이다. 하지만 1946년생 감독의 영화 목록 중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업들이 거의 20세기에 묶여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거장'이되 '과거의 거장'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상업적 성공이 작가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이 대중영화 내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는데 탁월한 솜씨를 선보여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감독의 후기 작업이 이전에 비해 현저히 낮은 주목도를 기록한다는 건 쇠락의 징후로 보기에 크게 어긋나진 않아 보인다.

그렇게 관심의 총아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여전히 감독은 현역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전성기에 비하면 작품 간격이 길긴 하지만 은퇴한 적이 없다. '알렉산더(2004)'나 '월드 트레이드 센터(2006)' 같은 작업은 좀 더 평가할 구석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이 주장하던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후 꾸준히 반골 기질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흔히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사실들에 질문을 던지는 올리버 스톤의 문제의식은 큰 굴곡 없이 이어지는 중이다.

전 세계 환경문제에 연대하던 감독의 전향서?
 
▲ "뉴클리어 나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이놀미디어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감독은 꾸준히 다큐멘터리 작업에도 관여하고 있다. 근래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작업을 꾸준히 만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반미', 즉 미국의 위선과 은폐된 죄악에 집중하다 역편향으로 기운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소련이 무너진 후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20세기 말 이후 세계가 기대한 역할 대신 무분별하게 힘을 낭비하고 자국 중심으로 기울며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반미'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반대급부로 선한 포지션이 되는 건 아닌데 감독의 근작들은 그런 함정에 빠졌다는 비판에 처하곤 한다. 세상이 선악으로 딱 나눠 구분되지 않는 법인데, 본인의 소신을 밀어붙이다 모순에 빠진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는 또 다른 논란을 촉발할 시한폭탄 같은 내용을 담은 채 공개되었다. 신작 <뉴클리어 나우>는 기후변화와 탄소배출문제에 대한 해법을 다룬다. 제주 강정 해군기지나 성주 소성리 THAAD 문제에도 관심을 표명하며 지지행동에 나섰던 이력 때문에 당연히 언젠가 선보일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지점이 도드라진다. 그 대안으로 원자력 발전의 전면적 재도입을 제안한 것이다. 대체 올리버 스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 방향 선회를 일종의 '변절' 혹은 '훼절'로 봐야 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내용물을 확인하는 게 급선무다.

문제의 그 영화, <뉴클리어 나우>는 2022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뉴클리어>, 즉 '원자력'이란 제목으로 최초 공개되었다. 베니스에선 큰 화제에 오르진 않았지만 2023년 초 다보스포럼에서 현재의 제목으로 상영되면서 큰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영화제가 아닌 행사에서 주목받았다는 건 본 작품이 영화의 예술성보다는 담긴 내용 때문일 것이다. 특히 '다보스포럼'이란 국제행사가 갖는 상징성과 결부해 보면 더욱 그렇다. 세계의 기업가와 정치인들이 모여들어 경제와 사회 현안을 다루는 행사 아닌가. 어찌 보면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그리고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데 책임이 큰 이들의 사교모임이라 욕먹어온 유구한 전통의 다보스포럼이다. 그렇게 '그들만의 리그' 같은 자리에서 본 작품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은 다르다?! 역사의 재해석

영화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초반에는 원자력 발전의 역사를 간략하지만 갖출 것 다 갖춰서 서술한다. 감독은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지론을 시작부터 전면적으로 전개한다. 마리 퀴리에서부터 엔리코 페르미,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초기 단계를 풀어내고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고만 원죄를 설명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억은 이 '청정에너지'에 파멸적 낙인을 찍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기억에 사로잡혀 세상 사람들은 원자력을 악마화하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원자력의 '무기'로서의 측면에 '청정에너지'로서의 효율적 측면이 묻혀버렸다는 개탄을 시작부터 던진다.

그런 충격적인 논지를 설파한 직후, 우리에겐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원자력 발전에 있어선 거대한 영향력과 지분을 가진 한 인물을 소개한다. 미합중국 해군 원자력의 아버지, '하이먼 리코버' 제독이다. 그는 미 해군 함정에 원자력 추진체계를 정착시킨 주역이다. 오대양을 무대 삼아 미국의 국력을 투사하는 핵심 수단인 해군 함대를 위해 무한의 항속력을 가진 원자력 체계를 도입하는 과정은 전인미답의 도전이기도 했다. 원자력 동력의 우월함을 홍보하기 위해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의 주역이던) 노틸러스 호의 이름을 붙인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으로 북극해를 통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감독은 하이먼 리코버에게 개척자-선구자의 이미지를 입힌다.

그런 군사기술 전문가로서의 면모와 동시에 그는 민간 원자력발전소 출범의 산파이기도 하다. 본인이 진두지휘해 안전제일주의로 비용 아끼지 않고 초기 개발단계에서 사고 한번 터지면 사업에 치명타를 입는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전인미답의 도전에서 큰 문제없이 프로젝트를 관리한 경력자다. 그런 그가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민간기업과 공유하며 극도로 철저한 완벽주의와 안전제일 원칙을 전파한 덕분에 미국에선 원자력 발전 관련 인명사고가 없었다는 것을 제작진은 거듭 강조한다. 우리에겐 미국의 대표적 원전 사고로 기억되는 스리마일 섬 사고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톤으로 풀이한다. 미국에서 원전 붐을 종식시킨 스리마일 섬 사고 당시에유출은 있었지만 발빠른 조치로 사망자는 없었다며 보는 이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파격적 재해석, 발상의 전환인가 억지 옹호인가
 
▲ "뉴클리어 나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이놀미디어
 
물론 영화는 대중적으로 뇌리에 깊숙이 박힌 원전 사고의 대표 격,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건너뛰진 않는다. 하지만 논지가 너무나 다르다. 체르노빌은 초동대처가 미흡한 인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재'를 강조하는 측면은 곧 대응만 시의 적절했다면 그런 큰 사고가 생기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원전 자체의 결함은 수습 가능했다는 것이고 하이먼 리코버 같은 유능한 책임자가 없는 당시 소련의 경직된 체제가 문제의 근원이란 주장이다.

후쿠시마에 대해서도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던 내용과는 결이 다른 논지로 이야기가 흐른다. 당시 인명피해는 지진 충격파로 인한 쓰나미가 문제였을 뿐, 원전 문제는 부차적인 데다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상상을 초월한 쓰나미 때문에 해변에 인접한 원전의 외부 방파제가 넘친 게 문제일 뿐, 원전 자체의 결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감독은 기존 환경운동의 관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전면화하기 시작한다.

대학 신입생 시절 인문사회계열이라면 교양과목으로 흔히 접하게 되는 법학개론 시간에 반드시 마주치는 쟁점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교통사고는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선에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논리다. 자동차는 충분히 살인수단이 되지만 사회적 편의를 위해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리버 스톤은 정확히 일맥상통하는 주장을 펼친다. 체르노빌의 경우 상당한 인명피해가 나긴 했지만 위기관리 측면의 '인재'가 핵심이라는 주장과 함께 사고의 비극성이 강조되면서 일종의 과잉된 '착시' 효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매년 석탄/석유발전 관련 오염이나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수치와 비교하면 체르노빌 인명피해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 이쯤 되면 거부감에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할 이들이 여럿 나올 법하다.

이런 착시를 설명하는 추가논리로 감독은 비행기 사고와 차량 교통사고 비교를 예시로 든다. 동일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 교통사고는 워낙 익숙해졌고 다양한 변수가 있지만 항공사고의 경우 상대적으로 낯설고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개별 변수가 적기에 더 극적으로 대조된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 때문에 우리가 교통사고에는 둔감해지는 반면 항공기 사고에는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발생 빈도로 보면 항공기가 훨씬 안전한데도 말이다. 논리와 예시 적용에서 관점 차이가 심하게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결정타로 감독은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를 혼용함으로써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에 대한 정치적 음모론을 추가한다. 누군가에겐 '불편한 진실'로, 누군가에겐 보수우파가 진보좌파에 대한 공격에서 단골로 활용하는 논리의 복사해 붙인 것처럼 여겨질 대목이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탈핵 탈 원전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주도세력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들과 화석에너지 기업의 후원 및 로비를 연결하려 한다. 그린피스의 출발 당시 함께 했지만 훗날 입장 차이로 탈퇴 이후 탄소배출이나 기후변화 부정론에 가깝게 선회한 패트릭 무어가 등장하고 원전 친화론자들이 대거 출현해 현대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거듭 선보인다. 감독이 무슨 생각일까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기존 관점에 파격과 혼란을 촉발하는 확신범의 도전
 
▲ "뉴클리어 나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이놀미디어
 
물론 올리버 스톤이 그냥 원자력산업에 부역하겠다고 작정한 건 아니다. 그래서 더 당혹스럽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미래를 근심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시간이 많지 않다며 호소한다. 확신범의 태도다. 감독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화석연료 대안으로 간주되는 재생에너지 현황에 대해 여러 자료와 통계를 모아 수치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려는 세계적인 노력을 부정하지 않지만 2050년이라는 결정적 시점에 맞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리한 재생에너지 강조가 실제로는 화석에너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영역까지 억지로 포함시켜 혼란을 부추기며 오히려 실익을 해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정부분 경청할 지점은 분명히 있다.

결국 감독의 논리는 2023년 현재 상황에서 화석에너지 발전을 통한 탄소배출을 축소할 실질적 대안은 원자력 외에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전반부 내내 강조했던 것처럼 원전의 위험성이 과대 포장되어 있지만, 현재 기술발전으로 상당부분 그런 불안이 해소되었거나 극복 가능하단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환경운동에 발목 잡힌(?) 미국의 우를 범하지 않고 원전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연구 중인 중국, 프랑스, 러시아의 관련 기술개발과 원전 확대를 모범사례로 후반부에서 적극적으로 소개한다.

일단 흥미로운 지점이 적지 않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핵융합 발전의 가능성이나 폐 연료 재처리 기술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실용화 진행 중인 고속 증식로나 초소형 원자로 등 다양한 모델을 소개한다. 세계를 누비며 발품을 판 감독 덕분에 흔히 접하기 쉽지 않은 원자력 산업의 최신 포트폴리오를 접하는 기분이다.

반면에 재생에너지 도입에 집중하는 미국과 독일 사례는 (의도는 좋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규정하며 이를 논증하고자 한다. 기후위기의 징후로 인한 이상기후 때문에 폭증하는 난방 수요를 위해 화석연료를 일시적으로 소비하는 지경이라면 왜 원자력 발전은 배제되어야 하는지 쟁점을 던진다. 일단 감독의 진심은 탄소배출 감소와 지구온난화 저지를 위한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결국 해소되지 않는 문제는 그런 충분히 논의해볼만한 이의제기 이면에서 이익을 꾀하는 이들이 누구인가일 것이다. 이 영화는 차분하게 토론되기보다 기존 환경운동의 대의를 부정하는 데 활용되거나 혹은 극단적 실용주의의 위험성으로 치우치는데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 때문에 아예 외면하고픈 이들이 적지 않을 테다. 하지만 그걸로 족할까? 적어도 해당 작품에 담긴 일말의 진정성, 혹은 감독이 일평생 견지해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식의 이면을 파헤치는 도전 의의가 아깝긴 하다.

적어도 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정도의 교육적 유용성은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개별 영화작품으로서보다는 사회운동 프레임으로, 논쟁을 위한 참고자료로서는 흥미로운 자료가 될 테다.

<작품정보>

뉴클리어 나우 NUCLEAR NOW
2022|미국|다큐멘터리
2023.12.06. 개봉|105분|전체 관람가
감독 올리버 스톤
각본 올리버 스톤, 조슈아 골드스타인
음악 반젤리스
출연 올리버 스톤 외
배급 이놀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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