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단잠은 폭풍 전야의 고요였다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김선흥 2023. 12. 1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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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다시 공사관에 소환되다

[김선흥 기자]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6년 7월 13일 오후에 상하이에서 윤치호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갑신정변으로 신변불안을 느껴 상하이로 건너가 유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영어로 소통할 수도 있지만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일기에 나의 말을 옮겨 놓았군요.

"아침에 포크씨의 편지를 받다.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Creterion Hotel)로 와달라고 청하는 내용이었다. 오후 5시경에 포크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한 채 서원으로 돌아오다. 6시 반경에 다시 가서 상봉하다.기꺼이 격년의 회포를 나누다. 

술잔을 주고 받음에 즈음하여 포크씨는 ......또 말하기를,  '데니(중국이 조선 정부에 파견한 외교고문)가 비록 좋기는 하나 중국을 편드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가 한불(韓佛) 조약을 깨뜨리려 했으나 그리하지 못하였고 조약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원돈(袁豚: 원세개)을 미워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러시아 공사가 4,000원을 들여 그 공사관을 지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탕싸우요우(唐少遊)가 지금 외아문(조선의 외교부)의 현직(顯職)에 있는데 온갖 흉모(凶謀), 잡계(雜計)가 목가(木哥: 묄렌도르프)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민주호. 윤정식. 변수가 돈을 훔쳐 일본으로 가 4,000원을 옥균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는데, 이 일의 주모자가 윤치호인 것으로 민영익 등이 다 믿고 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유길준이 지금 한규식 집에 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틀 후에 나가사키로 떠나 일본 각처의 변진(邊鎭)을 둘러보고 곧 우리나라로 가겠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금 우리 조정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틈이 없으나 오직 민응식(閔應植) 한 사람 만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의 외교에 관한 일은 자못 외형으로는 진보하였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자기는 일찍이 김옥균이 일본 정부에 의하여 압송된 것으로 들었다'고 하였다. 

또 여러가지 말할 것이 허다하게 있었으나 그가 바쁘기 때문에 부득이 작별하고 서원으로 돌아 오다. 오늘 포크의 수작, 접대에는 냉담한 기색이 있다. 괴이하다. 좌우로 생각하느라 밤새 잠이 달지 않았다."
-윤치호 일기 1886.7.13

간만의 휴가와 자유, 그러나

나는 상하이에서 일본 증기선을 타고 나가사키로 갔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휴가인가. 

한 달간 나가시키에서 요양을 한 후 인근으로 떠나 온천욕을 하였습니다.  건강이 호전되었습니다. 식욕도 살아났고, 원기 왕성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자유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실로 오랫만에 단잠을 자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건 폭풍 전야의 고요였을 뿐이었으니, 8월 20일 날아온 급보로 나의 단잠은 무참히 깨고 말았답니다. 

파카 공사가 해임되었으며 내가 공사관을 맡아야 하므로 즉시 한양으로 돌아가라는 거였습니다. 해군 제독은 군함을 당장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왜 유독 저에게 이토록 가혹한 시련을 주시나요. 나는 말할 수 없이 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버님도 짐작하시겠지만, 이러한 상황은 저의 진로를 뒤집어 엎는 방향으로 내닫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멈추게 될지 모른 채 말입니다. ...당장 국무성에 편지를 써서 공사관 근무를 거절해야 겠습니다.단, 파카의 후임이 올 때까지 공백 기간 동안만 거기 있겠노라고 해야겠습니다."
-1886.8.27 편지

때를 맞춘 듯 태풍이 불었습니다.  며칠간 배가 항구에 묵였습니다.  태풍이 멎자  제독 각하가 상하이에서 직집 나가사키로 왔습니다. 

데이비스 제독(Admiral Davis)이 기선(旗船) 마리온호를 타고 나가사키 항에 도착한 것은 8월 28일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나를 한양으로 급송하기 위한 것이었죠. 제독은 내일 아침에 출발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황급히 소지품을 챙겼습니다. 짐을 제독 부관의 보트에 싣고서 마리온 호의 선미갑판으로 올라 탔지요. 제독은 함장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습니다. 밤 10시 경이었지요. 

"바다로 나오니 순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배는 잘 나아갔습니다. 저는 제독과 모든 사관들로부터 최대의 예우를 받았답니다. 일개 해군 소위에 불과한 제가 제독을 비롯한 상관들로부터 공사의 예우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답니다. 정중한 예우를 받으니 기분은 무척 좋더군요. 제독과 많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었습니다. 제독은 저에 대하여 무척 만족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연락만 해 주면 모든 힘을 써주겠다고 거듭 거듭 말하더군요.

그는 개인적으로는 파카와 해군 사관학교 같은 반 생도였답니다. 그러나 파카를 거칠게 비판하더군요. 저는 8월 31일 제물포에 도착했답니다. 열한 발의 예포가 울리고 해군 의장대의 퍼레이드가 있었답니다. 함장과 사관들 그리고 여섯 명의 현문 위병(舷門衛兵, side boy)들의 사열을 받은 거랍니다. 그러한 예우가 저같은 일개 쫄자 'yello steerage dog'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
-1886.9.10 편지 

나는 9월 1일 혼자 한양으로 갔습니다. 공사관에 도착하니 오후 여섯 시더군요. 공사 면담은 거북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를 보자 마자 내가 공사관을 인수할 거라고 통보했습니다. 5분 만에 공사관 인수인계가 끝났답니다. 나는 그에게 오시페호가 제물포에 기다리고 있다고 일러주어야했습니다. 

9월 3일 그를 제물포로 보냈습니다. 호위병을 붙였지요. 공사는 국왕에게 이임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나는 파카 공사가 소환되었다는 사실을 조선의 외교부서에 알리는 공한을 작성하여 그에게 서명하도록 했습니다. 

여전히 벼랑 끝 

"제가 한양에 도착하자 모든 미국인들이 저에게 몰려와 축하하고 환영한다는 인사를 하더군요. 선교사들도 저의 복귀를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국왕은 관리 한 명을 제물포로 보내 저를 맞도록 하였구요. 여러 관리들이 밤낮으로 저를 찾아 왔답니다. 파카의 불미스러운 일은 장안의 화제 거리가 되어 있더군요. 데니에 의하면 왕이 파카의 소환을 요청하라고 지시했었답니다.

고종은 제가 조정에 들어와 자신을 돕는 대신 공사관에 간 것에 대해 몹시 섭섭해 하십니다. 저의 장래가 굉장히 걱정이랍니다. 저는 해군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이곳에서 복무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군요. 당분간은 정부 당국으로부터 지시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군요. 정부는 저의 신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제가 뭐가 될 것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버님, 제가 아는 한 어느 곳에서나 저는 평판이 좋답니다. 이들 나라에서뿐 아니라 저희 정부 내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것으로 인정받아 왔지요.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내일 아니면 모레 저는 아무 지위도 없는 벌거숭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지요. 그렇게 되면 저는 살기 위해 이 곳 저곳 손을 내밀어 돈을 빌려야 할 겁니다. 언제 갚을 지도 모르면서요.

만사에 '사악한 괴물monstrous injustice'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게 저를 점점 안절부절 못하게 하고 지치게 합니다.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이 무서운 구렁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답니다."
-1886. 9.10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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