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군에도 '철비'가 있었네
[완도신문 정지승]
완도군립도서관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책로를 걸었다. 예전에도 몇 번은 이곳을 찾았지만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고향을 찾아온 느낌이랄까. 옛것이나 빈티지 타입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그동안 쌓였던 긴장감이 보는 내내 해소되기 때문일 것이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빗돌에 깃든 사연을 알아가는 것도 소소한 재미중 하나다. 30년 전 여행지로 즐겨 찾았던 느낌이 고스란히 배어나 마치 보석처럼 빛난다. 골목길이 보이고, 시간은 여전히 그때 그 장소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산책길을 걷다가 아래로 내려다보는 마을전경과, 주도 앞 바다와, 가까이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는 여행지의 백미를 선사한다.
충혼탑으로 가는 계단에는 석비(石碑)와 철비(鐵碑)가 나란히 서있다. 석비와 철비가 이곳에 나란히 서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빗돌에 새겨진 사연을 읽다가 후면에 기록된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를 거슬러 상상속의 여행을 시작한다.
이곳의 철비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철비를 대신해 나란히 석비를 세워 그 내용을 자세히 비문에 기록했다.
철비는 227대 가리포첨사 명선욱(明瑄煜)의 영세불망비. 조선 시대, 각 진영에 속한 종3품 무관 벼슬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낸 가리포첨사의 '행절제사명공선욱영세불망비'로 1894년 10월에 세워졌다.
명공이 가리포진에 발령 받아 온 것은 고종 30년인 1893년 1월 29일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가리포진이 폐진 되었고, 마지막 첨사가 온 것이 1894년 7월5일이니 1년 반 남짓 근무한 것으로 '가리포첨사 선생안'에 기록되어 있다.
철비는 전국에 드물게 분포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마을 사람들이 쇠붙이를 모아서 세운 철비도 있다. 석물 안에 세운 것도 있고, 전각을 만들어 세운 철비도 있다. 그러나 철비 하나만 달랑 세워진 게 대부분이다. 철비는 문양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머리에 관 모양을 하고, 나뭇잎, 나뭇가지, 투구, 동그라미 등 각자의 특색 있는 모양을 갖췄다.
2007년 포스코 역사관에서는 '잊혀진 문화제 철비' 라는 제목으로 전국에 있는 철비를 조사하고 탁본하여 전시회도 열렸다. 쇠는 돌보다 강해서 영원하다는 믿음 때문에 공덕비를 철비로 많이 세웠다고 한다.
선정비는 보통 돌에 새긴 석비가 주를 이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쇠로 만든 철비가 많이 세워졌다. 철비는 백성을 다스린 지방관의 업적과 그를 영원토록 기리고자 하는 감사한 마음이 스며있는 철조유물이다.
그러나 철비들은 갖은 수난을 겪기도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수난을 겪은 철비가 많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다다르자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만들 물자 공급 때문에 우리나라 민가의 쇠붙이는 모조리 강탈했다.
그때 많은 철비가 회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일본은 전쟁 물자에 필요한 자원을 모으려고 각 마을별로 울력과 더불어 자원 할당량을 채우게 했다. 쇠붙이뿐만 아니라 곡식과 면화, 연료가 될 소나무의 송진까지도 할당량을 채우도록 했으니, 거기에 희생된 문화재급 소나무도 전국에 상당량이 된다.
완도군의 철비도 일본의 수탈을 피할 수 없었다. 1942년 완도 군외면 선착장에 일본은 명공의 철비를 철거해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제작하려고 야적해 놓았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지역 항일운동가인 소남 김영현 선생이 군외면 갈문리 사람과 함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근처 황진리에 사는 그의 조카 김내호 집에 옮겨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현재의 위치에 놓인 것은 해방 후 일이다.
전국의 철비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8기 정도이며, 한국철비대관이라는 보고서에는 전국에서 조사된 철비를 지역분포도와 시대별로 구분하여 기록하기도 했다. 철비마다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다.
그 중 특이한 철비로는 숙종 10년인 1684년에 서당을 운영하려고 창립한 학계의 운영에 관한 철비는 1714년에 건립한 진도군의 학계비다.
그리고 울진군 북면 두천리의 '내성행상불망비'는 내성과 울진장을 넘나들던 보부상의 우두머리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을 위한 것이다. 상인들의 상행위를 도와준 것에 대한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 한글로 제작한 철비도 있다.
백성들은 자기 지역에서 업적을 이룬 지방관을 기리기 위해 마을에 일반적으로 빗돌을 세웠다. 하지만 선정비는 마음대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정비를 세우기 위해서는 조정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지방관 중에는 부임한 곳의 유력세력과 결탁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해 지방관을 그들이 연관된 고향이나 지역에 부임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들이 도입되기도 했다. 다만 일부 지방관들은 백성들을 협박하여 억지로 선정비를 세우게 하는가 하면 자신이 직접 돈을 들여 선정비를 세우는 일도 발생했다. 무수한 세월이 흘렀어도 그 방식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완도군에는 비석거리가 있다. 지명으로 보아 이곳에는 빗돌이 꽤나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빗돌은 어딘가에 묻히기도 했을 것이며, 관리가 안 되어 대부분이 훼손됐을 것이다. 그것은 지역의 역사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슬픈 일이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작은 철비 하나라도 지켜내려 한 사연은 후손들에게는 큰 울림이다. 그것을 몸소 지켜내려고 했던 것, 누구든 나서서 지켜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찾는 일이었던 것이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지역 사회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완도군이 처해있는 영토분쟁도 마찬가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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