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주군, 해녀들 사수도 지킴이로 둔갑시켜"

완도신문 정지승 2023. 12. 1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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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도 분쟁 완도군은 빼앗겼고, 전남도는 내어준 꼴완도군, 끝났어도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 계속되어야

제주도의 최북단 유인도 추자도에서 23.3km, 전남 완도 남단 소안도에서는 18.5km 거리의 무인도인 장수도(사수도)를 둘러싼 두 지자체간 분쟁이 최근 들어 다시 시작됐다. 이에 <완도신문>은 완도 사수도와 관련한 역사적 근거와 주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기자말>

[완도신문 정지승]

ⓒ 완도신문
 
제주특별자치도 추자면 예초리에는 사수도와 관련한 기념비가 하나 있다. 사수도 분쟁 초기에 북제주군이 세운 것으로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하추자도에서 동쪽 36km 거리에 있는 138.701㎡의 무인도이다. 이 섬을 전라남도에서는 잊을만하면 완도군 소안면 소속 장수도(障水島)라고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1919년 세부 측량 때 예초리 산 121번지로 확정되고 예초리 사람 김유홍(金裕洪) 명의로 등기, 또 1930년 일본인 다나카(田中斗)가 어장 확보 차 매입 등기되고, 조국 광복이 되자 국유지가 되었다. 

1961년 추자초등학교 교장 박철규(朴哲奎)와 학부모회장 박병술은 흑송 1천 본을 심었고, 1962년 다시 1천 본을 심어 지상권을 선점, 황금어장의 수입으로 학교 발전기금을 조성 1967년 제주 세무서로부터 7만3500원으로 매입 등기된 바 있다. 

또 1993년 제주도 교육청에서 교육재산으로 이전하려 한 바 있다. 선각자 박 교장은 1993년에 타계하고 1994년 3월 추자도민들은 박철규 선생 송덕비를 학교 교정에 세워 그를 기렸다.'
 
ⓒ 완도신문
여기에 새겨진 내용을 자세히 보면 사수도를 뺏기 위해 그간 벌였던 일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1979년 완도군은 미도서 등록을 위해 북제주군이 영토 주장한 사수도(泗水島)를 장수도(障水島)로 명명하고 소안면 당사리 산 26번지로 지적부여 해 내무부에 등록했다. 장수도란 이름에는 '완도군의 바다 영토를 지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겼다. 

그러나 일반에 알려졌던 장수도(獐水島)와는 한자 표기가 전혀 다르다. 노루섬의 의미가 아닌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는 수문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완도군은 장수도(障水島)라 명명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바다의 경계를 긋고 무인도를 개인 소유로 한 것도 의문이다. 게다가 창씨개명을 한 것인지, 정말로 일본인이었는지 두 번째 소유자는 그곳에서 어장을 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인 섬이 된 사수도는 조국 해방이 되자 다시 국유지가 되었고, 1961년 추자초등학교 운영위원회가 나서서 그 섬에 나무를 심어 지상권을 확보했다. 국유지에 지상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자기 영토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추자초등학교 운영위원회는 사수도 해역의 어장권을 임대하여 학교발전기금과 운영자금을 확보하려고 지상권을 선점하고, 지금 돈의 가치로 1000만 원도 못 미치는 금액을 제주세무서에 납부하여 사수도 등기 이전을 마쳤다.

이후 박철규 교장이 사수도를 확보해 학교 재산을 늘렸다면서 큰 공을 세웠기에 박 교장의 송덕비를 학교 교정에 세웠다고 새겼다. 조사한 결과, 박철규 교장은 추자초등학교와 추자중학교를 거치며 3대를 이어 학교장을 역임했고, 교육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송덕비가 세워진 것일 뿐, 사수도를 확보해 공덕비가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공적 사실은 제주시교육청 자료에 그대로 남아 있다.

사수도 분쟁이 시작했을 때, 북제주군은 여러 상황을 만들어 한 사람을 지역의 영웅으로 둔갑시켰고, 추자도에서 생활하는 김성남 해남을 포함한 해녀들을 이용해 사수도 지킴이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북제주군은 군기를 사수도에 세우고 해녀 막사를 지어줬다. 그리고는 해녀들을 사수도지킴이라고 내세웠지만, 추자도 해녀들은 그동안 배를 이용해 사수도로 물질 가는 뱃삯을 지자체로부터 지원받은 바 없고, 기름 한 방울 지원 받은 것이 없었다.

북제주군이 철저히 추자도의 해녀들을 이용했으며, 북제주군이 제주시로 이속되고 사수도 분쟁과 관련한 업무가 제주특별자치도에 이관되면서 사수도 해역 분쟁을 더 공고히 했다.

이 석연치 않은 사실관계를 북제주군은 자세히도 돌비에 기록으로 남겼다. 그때 완도군은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장수도를 빼앗겼고, 남의 집 불구경하듯 관심도 없던 전라남도는 사수도를 내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여러 면에서 살펴보더라도 그동안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2008년 헌재는 제주도 편을 들었다. 판결로 사수도 분쟁이 끝난 것 같지만, 완도군은 끝나지 않은 싸움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사수도 해역을 되찾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의지와 전라남도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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