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안지로 "나는 아이언맨"... 학교가 뒤집혔다
[정은영 기자]
▲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사진은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 11월 1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여고의 모습이다. |
ⓒ 사진공동취재단 |
요즘 고등학교는 기말고사 시즌이다. 빠른 학교는 이미 치렀겠지만 우리 학교는 다음 주에 시험을 본다. 그래서 학생들은 올해의 마지막 열정을 다해 공부를 하고 있다. 시험이 끝나면 학술제, 합창제, 동아리 발표회가 쭉 기다리고 있다. 교사들도 바쁘긴 매한가지다. 기말고사 시험 문제를 내느라, 학기말 수행평가 채점을 마무리 하느라 정신이 없다. 학교생활기록부 작성이라는 엄청난 파도도 밀려오고 있다. 교육청에서 요구하는 각종 결과 보고서도 내야 하는 시기다.
그래도 시험 문제를 내고, 무사히 성적 산출까지 마무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 주 시험을 앞두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혹시 문제에 오류는 없을지, 괜히 부정행위로 처리되어 빵점 처리되는 학생을 없을지, 동점자가 너무 많이 나와서 등급 산출에 어려움은 없을지 걱정된다.
"5개를 골고루 내 주세요"
그런 와중에 시험을 볼 때마다 나타나는 황당한 학생들도 있다. 대부분 열심히 문제를 풀지만, 시작과 동시에 마킹을 끝내는 학생들도 많은데 우리는 그들의 찍기 행위를 소위 '기둥 세우기'라고 부른다. 하나씩 마킹하는 것도 귀찮아 쭉 일직선을 긋고 자는 학생도 꽤 있다. 한 번호로 쭉 찍고 바로 눕는 것이다. 지필평가의 한계일 수도 있으나 어떤 평가 방식이어도 무관심한 학생은 있을 수 있다. 공부에 흥미가 없을 수도 있고, 성적을 신경쓰지 않는 학생도 있을 수는 있다. 그래도 한번 문제라도 읽어보면 좋으련만 아쉬운 마음이 든다.
물론 시험을 출제할 때는 5개의 선택지 중 정답 배율을 골고루 나눠 놓는다. 그런 이유로 한 번호로 찍으면 20점 근처의 총점이 나오는 편이다. 물론 각 문제의 배점이 다르기 때문에 몇 번으로 찍었느냐에 따라 총점에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찍고 자는 학생들도 자신들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어서 교사들이 정답으로 1번이나 2번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보통 3, 4, 5번 이 세 번호로 찍는 경우가 더 많긴 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지금은 졸업한 용준이(가명)가 동료 수학샘께 시험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러 찾아온 적이 있었다. 용준이로 말할 것 같으면 눈빛은 선하지만 공부에는 관심이 적은, 발랄하지만 가끔 욱하는 그런 학생이다. 게다가 졸업 사진을 찍기 위해 옷을 사고 스티커 용 문신을 하는 등 그 누구보다도 삶의 즐거움에는 최선을 다하는,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는 학생이다.
그런 용준이가 3학년 1학기 확률과 통계 과목 시험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러 온 것이므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흥분해서 찾아온 용준이의 말은 이랬다.
"이번 시험 문제에 큰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 몇 번 문제가?"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뭐라고?"(수학샘은 이때부터 황당)
"정답 배치에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껏 한 번호로 찍어서 10점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그랬습니다. 선생님께서 정답을 골로루 배치하지 않으셔서 그렇습니다."
"아... 그랬니? 샘이 거기까지 신경쓰지 못했구나. 하지만 그게 문제의 오류라고 볼 수는 없지 않니?"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미안하다. 신경 쓰마."
씩씩거리는 용준이를 겨우 달래고 돌려보낸 뒤 수학샘은 자신이 사과를 할 일이 맞나 싶었지만 재밌는 에피소드로 넘기셨다. 다만 살다 보니 용준이에게 이의제기도 받아본다며 껄껄대며 웃었다.
마킹으로 예술도 한다
또 2~3년 전 졸업생 하나는 3학년 2학기 시험 답안지에 예술적(?)으로 장난을 친 적이 있어서 교사들을 황당하게 한 적이 있었다.
본래 시험이 끝나면 학생 답 정오표라는 것을 나눠주고 확인시킨다. 혹시 무표기는 없는지 이중 마킹이나 오류는 없는지 살피기 위해서다. 가끔 컴퓨터사인펜이 불량이어서 체크를 했는데도 무표기로 나오거나, 작은 점 하나로도 두 번호를 마킹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억울한 친구들을 구제하기 위한 게 정오표 확인이다.
그 정오표 맨 밑을 보면 1, 2번 복수 마킹은 a, 1, 3번 복수 마킹은 b 이런 식으로 알파벳으로 표기된다는 설명이 나와 있다. 사실 나는 매번 보지만 그 알파벳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늘 정오표를 보면서 몇 번이 복수 표기인지 확인해야 정확히 알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그 복수 마킹을 표현하는 알파벳을 전부 외워 한 문장이 되도록 답안을 표기한 학생이 나타난 것이다. 그 문장은 바로, "I am Ironman"(나는 아이언맨이다)이었다. 온 학교가 (정확히는 그걸 확인한 교사들이) 발칵 뒤집혔다. 학교에 천재가 있다고 재밌어 하기도 했지만 시험을 장난으로 본 것에 대해 괘씸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용준이나 그 아이언맨이나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마킹을 하는지 나는 잘 짐작이 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공부에, 시험에 진심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그 아이들에게 다른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마음껏 알려 주지 못했다.
한 번호로 찍고 자는 학생들이라고 마음이 편했을까. 그냥 해치우는 심정으로 시험을 치르고, 학교를 다니는 것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 아이들에게도 뭔가 행복한 일을 많이 만들어줄 수 있는 학교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찍기 원칙을 어그러뜨린 교사에게 귀여운(?) 항의를 하러 온 용준이는 적어도 그날 속이 시원했을 것이다. 아이언맨을 만들어 놓은 그 학생은 그 순간 얼마나 뿌듯했을까. 적어도 그 친구들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고등학교 때 추억을 하나 만들었으니, 그런 면에서 그들은 진정한 마킹의 달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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